그림 감상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인가? 코로나 19로 인하여 닫혔던 미술관들 문이 일제히 열렸다. 개관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아 관람객의 발길도 뜸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작품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오래간만에 장을 보고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평소 우리가 한 달 내지 두 달에 한 번꼴은 쌀을 사러 파리 오페라 근처 한국식품점에 간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들리는 곳이 바로 루브르다. 비록 이날이 아니더라도 심심파적 무시로 들려서 삶의 자극제로 삼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 우리는 장 본 물건을 자동차 드렁크에 실어놓고 근방 식당에서 조촐하게 점심을 먹은 후 루브르 미술관 명화들 숲에서 유유자적 산책을 하며 소화를 시킨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한다. 그동안 문화생활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
루브르는 익히 알려진바대로 훌륭한 걸작품이 많이 소장, 전시된 세계에서 손꼽히는 박물관으로써 넓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 나라, 분야, 주제, 경향별 작품이 한량없어 매번 한 부분만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보거나 또는 얼마든지 관람객이 적은 공간을 찾아 조용히 감상할 수도 있다. 이점은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특히 루브르 박물관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남편 말을 빌자면 "루브르의 이 많은 작품을 다 볼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깊이 있게 보면 된다" 사실 그렇다, 이토록 수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다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보아서 소화는커녕 한점도 제대로 가슴속에 담을 수가 없다. 단 한 작품이라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몰두하여 느끼는 것이 최상의 감상법이다. 그렇다고 몇 미터 건너서 마땅히 보이지도 않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만을 꼭 집어 억지로 관중들 틈새를 비집고 보라는 뜻은 아니다. 루브르에는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작품도 많다.
우리는 시시로 갈 때마다 구태여 무거운 과제처럼 여길 필요 없이 몇 점만 선택해 종종히 즐기면서 보고 온다. 특히 내 남편은 그림을 보는 안목은 물론이고, 웬만히 전문가 못지않은, 전문가답게 미술사적 지식도 풍부해서, 몇 세기 때 어떤 거장의 명화가 어느 나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정도까지 그의 뇌리에서 훤히 꿰고 있다. 하물며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은 그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어떤 면을 집중적으로 볼 것"인가도 자상하게 알려준다. 당연 그의 곁에서는 어떠한 미술 가이드가 필요치 않다.
나는 그와 동반해 오는 동안 그의 수십 년간 쌓아온 감상법을 적잖게 믿고 기댄 나머지 나 역시 오늘날 좋은 작품이라면 금방 눈에 들어올 만큼 시각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우리는 안내용 책자나 이어폰 따위에 의지하거나 이론적인 것에 중점을 두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차라리 감상에 방해만 될 뿐이다. 오히려 작품을 곰곰이 보면서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을 우선으로 여긴다. 그래야만 이론에 말미암아 선입견이 감각을 가로막지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깊이 있게 새겨지는 법이니까.
나는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온 관람객들의 태도에서 때때로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작품 앞에 서서 실제 그림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을 낀 채 초점 없이 멍하니 그림을 막고 서 있다. 아마도 열심히 이론적인 설명을 읽고 듣는 중이리라. 또는 그림을 감상하기보다 사진 찍기에 바쁜 사례도 자주 목격한다.
과연 그렇게 해서 그림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있을까? 그림 앞에서, 평생 어쩌면 한번 가질 수 있을 좋은 기회를 허술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든지 미술관에 오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행동을 굳이 미술관에까지 와서, 그럴 바에야 미술관을 왜 왔으며,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각 들게끔 한다.
만약 작품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얻을지는 몰라도 알맞은 감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얇은 지식이 왜 필요하며, 꼭 필요 불가결한가? 설마 교양 있고 문화인 인양, 잘나고 아는 척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하필 그림을 가로막아 다른 관람객들에게 방해까지 하면서?
그림 감상이란 이론적인 것보다 눈에 담아 가슴에 새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론은 그다음 순서다. 설령 이론적인 지식이 부족해도 좋은 작품을 보는 데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 능력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론에 너무 중점을 두고 치우치다 보면 자칫 감각 능력에 장애가 되어 이론적 관점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이론이고 내 감각을 그 관점에 끼워 맞춘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히 순수한 인식력이 떨어져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에 지장을 받는다. 결국 진정한 자신의 감각에서 우려 난 것이 아닌 잡다한 겉핥기 식 얇은 지식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인쇄된 복사품이나 압축된 화면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세심한 부분까지 보면서 직접 느끼기 위한 것이다. 가령 그림의 실제 크기부터 그 규모에 따른 전체적 구성과 질감, 오묘한 색채감,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깊이감 등등. 분명 거기서 복사품과는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고 전해지는 영감도 다르다. 우리는 그것들을 파악하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운 감각을 깨우치려는 것이다.
비록 그림에 무 외한이더라도 훌륭한 작품을 깊이 있게 자주 보다 보면 그림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쌓이고 좋은 작품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론은 차후 그림에 흥미가 생기다 보면 자연스레 구하게 된다. 구태여 아니래도 상관은 없지만, 어떤 계기에 이론 전문가의 견해를 습득하면 아! 하고 비로소 자신이 느낀 점과 비교, 차이 또는 옳고, 다름 그리고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얻게 된다. 그렇게 안목은 하나 둘 쌓이고 진정한 내 능력이 된다.
남편과 나는 가끔 우리들 작품 전시장에서 그림에 전혀 조예가 없는 분이 도리어 우리 그림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들이 이론적 지식이나 선입견 없이 직접, 순수하게 보이고 느끼는 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좋은 감상법이란 우선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그림을 직접 세심하게 깊이 보는 것이 최선이고 더 자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을 반복해서 계속보다 보면 심오한 부분까지 자연히 보이게 마련이며 어느 순간에는 화풍과 개성에 따른 차이까지도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써 작품을 보는 시각은 확장되고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판별력도 더불어 생겨난다. 그러다가 자신만의 감상법이나 좋아하는 점도 터득하게 되리라. 또 좋은 그림은 누구에게나 아무리 보아도 지겹게 느끼 지지 않으면서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날 우리의 목적지는 언제나 북새통을 방불케 하여 후다닥 스쳐 지나기만 했던, 이탈리아 회화관이다. 비로소 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 작품을 보면서 이 살롱 안을 처음으로 여유만만 걸을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가 전시된 이 공간은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이 작품을 보려고 엄청나게 몰려드는 관람객들 때문에 내가 도저히 끼어 들 엄두도 자리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연지 일주일째 벌써 관람인파가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은 했지만, 예전 수준에는 삼분의 일 정도밖에 미치지 않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되찾은 아름다운 일상, 한만히 그림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역시 대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은 볼 때마다 그 어떤 것보다 내 마음에 안정과 위안을 가져다준다.
이토록 가벼운 걸음으로 산책 삼아 루브르 미술관을 찾아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조건과 그 행운에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