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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이에서 만난 사람들

미얀마 여행

by 다나 김선자



일전에 나는 2009년 미얀마 여행에서의 첫인상을 말한 바 있다. 거기서 영국 식민지 시대 건축물이 잔재로 남아있던 옛 수도 양곤(랑군)에 도착해 느낀 인상들을 주로 말했었다. 이어 오늘은 양곤을 떠나 미얀마 중부에 위치한 제2의 경제, 문화 도시 만달레이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만달레이의 역사적 문화유산에 대한 감상문을 적기에는 그 범위가 방대하여 길지 않은 며칠간 여행으로 분명 내 능력의 한계가 있다. 그 위대한 유산들을 짤막하게 간추려 옮길 만큼의 해박한 역사적 전문성도 없을뿐더러 나 스스로 미학적인 논리도 정리되어있지 못하다. 그러기에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유적지를 탐방했었고, 바쁜 일정으로 지친 나머지 본 것마저 애매모호하다. 무지한 상태로 오직 남편의 설명과 가이드에 따라 움직이면서 하나하나 눈에 담아 소화해내기에도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깊이 각인된 몇몇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언덕 기슭으로 나무와 수풀 사이에서 황금색과 흰색 파고다가 불쑥불쑥 여기저기 종려나무처럼 솟아 있었다. 비탈길 따라 이어진 물부리 모양의 뾰족탑을 이정표 삼아 꼬불꼬불 힘들게 올라 한참 만에야 도달한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아라와디강을 가로질러 그야말로 장광이었다. 궁전을 비롯해 불교사원과 파고다가 곳곳에서 황금색, 흰색, 붉은색으로 수놓아져 녹색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불국 정토에 와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이 엄청난 규모의 멋진 유적에 탄복하여 '오! 아름답다'라는 말 외에는 감히 더 이상 형언할 방법이 없었다.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꼰바웅 시대의 수도다. 1857년 민돈왕이 언덕 기슭에 수도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어 영국 식민지 시대가 열리자 그 막을 내렸다


우리는 양곤에서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여 만달레이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시내의 호텔로 향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이 짧은 여정에서 내가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양곤과 확연히 다른 날씨였다. 후덥 지건하게 불쾌했던 양곤의 열대 몬순 기후와는 다르게 사막 같이 끓어오르는 더위임에도 한결 기분은 상쾌했다. 길가에 나지막한 가시나무들도 고온 건조함을 말해주었다. 대기 속 무거운 습기가 증발되듯이 내 몸의 수분도 빠져나간 듯 가벼웠다.

에어컨은커녕 낡아서 덜덜거리는 택시의 소음 따라 풀풀 날아오른 모래흙 먼지가 시야를 가리며 내달리던 한적한 시골길에서 마른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었다. 내 어린 시절 흙먼지 날리며 걷던 한국의 시골길 정서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열린 창문으로 뿌연 흙모래 먼지가 내 얼굴을 뭉개고 들어와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내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불현듯 신흥 주택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처 도로포장도 되지 않은 길가에 겉이 번드르르한 이층 양옥집들이 뽀얀 먼지 속에서 어색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본 소박한 전통적 삶의 미얀마 풍경과는 너무나 낯설어 오히려 생뚱맞았다. 왠지 거만하고 유치하게도 느껴져 마치 어깨를 쩍 벌려 힘자랑하는 건달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중국에서 이주한 신흥 부자들의 거주지역이었다.

건물이란 주변 자연경관과 더불어 어우러져야 운치가 있고, 포근하며 안락한 보금자리일진대, 더운 지방에서 지은 지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비포장도로 위에 지나치게 돌출된 형상의 저속하고 천박한 부조화였다. 마치 키치(kichi, 예술에서 저급함을 뜻하는 미적 가치) 적인 느낌이랄까?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호텔에서 몇 걸음 건너에 한국 식당 간판이 보여 반가운 나머지 주저 없이 들어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뿐, 정확히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맛있었다는 기억도 없다. 한국식이라고 온전히 말하기도 힘든 어정쩡한 음식이었다고만 생각 든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미얀마 소년이 메뉴판을 들고 왔고, 우리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그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몇 마디 한국어와 영어 단어를 눈치껏 짜 맞춘 결과 그것은 한국음식에 대한 소년의 찬사였다. 김치와 떡볶이를 아주 좋아한다던 그는 한국 식당에서 일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또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 티브이 앞에 우르르 모여 넋을 놓고 보던 사람들의 풍경과도 상통하여 생소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식당 주인은 아기를 안고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는, 미얀마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이라고 소년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지만, 주인과는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선 곳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날 수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만달레이에서 만난 순박한 인상의 택시기사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우리는 오후 나절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멀쑥한 택시 기사 남성과 예약을 했다. 점심식사 후 약속시간에 나타난 택시기사는 대리로 동료 택시기사를 데리고 왔다. 의사소통이 어려워 상세히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은 다급한 일이 생겼다고 변명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통보하는 식의 태도에 불쾌감이 들었다. 우리의 의사나 양해를 먼저 묻기는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손님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처사가 어쩐지 거만하고 불순하게도 보였다. 거기다 동료 기사에게 마치 하인 대하듯 우쭐대는 꼴이 매우 건방져 보였다.

내 남편은 일찍이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행에 많은 경험과 일가견이 있고 그들 문화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개발도상국의 비민주적이고 위계 사회에 익숙된 힘의 우월감에 대해서만은 피곤하게 여기며 역겨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도 사람도 남루하지만 말없는 젊은 대리 기사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고 이왕이면 그의 체면을 살려서 동의를 했다.

그런데 조심성 있고 차분한 성격의 대리 택시기사는 예의도 밝아 한나절 함께 다녀도 전혀 불쾌하거나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금방이라도 퍼질러버릴 것 같은 고물 택시에 실러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오후를 보냈다.

우리는 다음날도 같은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그와 약속시간을 정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약속시간 전에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추레했던 어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누렇게 변색된 후줄근한 조끼 러닝은 벗어버리고 깨끗이 다림질된 하얀 반 소매 셔츠의 말끔한 차림새였다. 추측컨대 얼떨결 평소 행색으로 따라나선 어제와 달리 오늘만큼은 손님을 위해 예의를 갖춘 것이리라. 그런 그의 처신은 나를 미소 띠게 했고, 속으로 고맙게 여기면서 흐뭇했다.

그리고 또한 오래된 낡은 고물 택시 앞 유리창 중앙에 하얀 재스민 꽃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택시가 커버 길을 돌 때마다 흔들거리며 은은하게 내뿜는 재스민 향기가 싱그럽게 코끝을 스쳤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를 거들어 "음, 향기가 너무 좋네요" 말하자 그 차분한 성격의 기사분은 우리와 조금 친숙했는지 드문드문 간격을 좁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아도 제법 남편과 소통이 되었다. 나는 그의 점잖고 예의 바른 행동거지에서 가난한 지성인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잠시 그가 했던 얘기를 요약해 옮겨보면, 어제 우리에게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재스민 꽃을 사 걸었다고 한다. 그것은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과 뜻의 징표이며, 오늘 역시 행운이 깃들 것을 바라 담았단다. 그리고 자기가 입은 와이셔츠는 자신의 딸이 깨끗하게 다림질해 주었다고도 했다.

그에게는 어제 수입이 뜻밖의 좋은 행운으로 그의 가족들에게도 다소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는 보탬이 된 것이리라. 우리에게는 물가 가치로 따져 큰돈이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적지 않은 수입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경제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나 그때 미얀마는 한국의 60. 70년대를 연상시켰다.

그 당시 여행객 발길도 뜸한 나라 상황에서 어제 그에게는 흔치 않은 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덕분에 가족이 느낀 훈훈한 분위기까지 전달되어 괜스레 나 또한 그 가족 일원인 듯 기뻤다. 평온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하루의 생활에 감사하는 그 소박한 마음씀은 재스민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느껴졌다. 어려운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입 일부를 나누어 신께 감사함을 표하는 검소한 마음가짐에 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차림 차리를 단정하게 고쳐 손님에 대한 예의까지 차려준 듯해서 그의 따뜻한 배려심과 친절함이 참으로 고귀해 보였고, 그 어느 부유한 지식인보다 겸양 있는 덕과 품격을 잘 갖추어 지녔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하루는 우리가 골동품 가게를 찾았다. 가게 주인은 우리에게 대뜸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내가 답하자 그는 프랑스 향수를 가지고 있느냐고 말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샘플용밖에 없다고 했더니, 즉시 내가 메고 있던 가방에 눈길을 던지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리고서는 내 가방과 골동품 한 점을 교환하자며 무엇이던 가게 안에서 원하는 걸 골라라고 했다. 나는 잠깐 동안 마음이 동해 갈등은 했으나 딱히 우리가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지 못해 결국 거절하고 나왔다.

나중에 깨달은 바로는 미얀마의 폐쇄적 상황이 빗어낸 암울한 현실이었다. 국제적으로 차단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서양문물의 희소성에 미얀마인들이 가지는 무조건적인 환상과 호기심 같은 동경이었다. 특히 프랑스 제품은 희소가치와 더불어 높이 호평받고 있었다.

다음날 택시기사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외곽에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도 같은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작은 불상 두 개를 현금으로 구입했다.


만달레이에서의 마지막 날, 같은 택시 기사가 우리를 바간행 버스정류장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날 아침, 호텔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기다리고 있다며 호텔 직원으로부터 기별을 받았다. 아직 약속시간 전인데 왜 벌써 부르는지 이상하게 여겨 서둘러 내려갔더니, 택시 기사와 함께 첫날 그를 대리로 데리고 왔던 우리와 약속을 깬 기사가 함께 서 있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무슨 일이냐? 뭐가 문제냐?"라고 묻자, 우리 택시기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옆에 있는 택시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막막해하는 기색을 미루어 짐작컨대, 상대방 기사가 어떤 강압적인 방법으로 양보를 요구한 게 역력했다. 그 교활한 자가 우리 택시 기사의 차주인지 높은 지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또다시 그에게 불쾌감이 생겼다. 우리가 그들 간의 구성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태도가 오만불손한 기회주의자로 보여 얄밉게 느껴졌다.

남편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가 표어로 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 계급 사회의 약육강식이나 비민주주의적 방법이 쉽게 용인되지도 않을뿐더러 매우 불쾌감을 느낀다. 프랑스인들은 더구나 내 남편은 인간평등의 가치를 존중한다. 따라서 그에게 이 상황이 위력이나 압력적인 방법으로 비쳐 그 형태가 눈에 가시처럼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은 "정 그렇다면, 두 분의 택시를 모두 거절하겠다"라고 말하고는 무거운 가방을 끌고 걸어서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다음에야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바간행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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