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그홀레(Groslay)에 왔다.
현관을 들어서는 M은 내게 감기를 옮길 수 있다고 볼인사를 완곡히 거부한다. 전등 아래서 보는 그녀의 여윈 몸은 어찌나 두툼하게 감쌌는지 마치 남극에서 온 펭귄 모양에 작고 갸름한 얼굴이 더 조그맣다. 뒤이어 지구봉처럼 굽은 허리에 머리와 턱수염이 허연 가운데 총총한 두 눈을 반짝이며 '허허' 웃음으로 G가 들어선다. 우리는 볼인사를 나누고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M의 작은 몸에서 미끄러져 나온 크고 두꺼운 외투와 머리와 귀를 감싸고 목을 두르고 감았던 무려 다섯 개의 풀어놓은 울긋불긋 목도리는 마룻바닥에서 수북하게 두렁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들고 온 각각 다른 여섯 종류의 쵸코렛을 꺼내 놓는다. 나는 M이 올 때마다 들고 오는 쵸코렛을 좋아한다. M의 입맛은 까다로운 성격만큼이나 섬세하고 민감하여 언제나 맛있는 수제 쵸코렛을 들고 온다. 쵸코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그녀의 쵸코렛은 지나치게 달거나 쓰지 않고 담백하여 내 곁에 두고 잘 먹는다.
A는 우선 M이 꺼내놓은 쵸코렛과 그가 준비한 피스따쉬(Pistache:피스타치오 열매) 케이크를 맛보자고 카페인을 제거한 마실 차를 가지러 일어서자, M은 우리에게 감기를 전염시킬 수도 있으니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을 사양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배낭에서 커다란 꿀병과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과 수저와 컵까지 순서대로 꺼낸다.
그 모습에 평소에도 유머 감각이 뛰어난 A는 유쾌하게 농담 한마디를 곁들인다. '우리 집에도 꿀과 뜨거운 물을 데울 수 있는 전기나 가스가 있지만 수도꼭지는 없는데 M, 가방에 수도꼭지 안 넣어 왔어?'라는 말이 끝나자 우리는 한바탕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토록 자연스럽게 그들 부부의 그홀레 방문을 환영했다.
평소 같으면 그녀 가방에서 미술관을 돌며 드로잉 한 열정 어린 스케치북이 잔뜩 나왔겠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배낭에서 뜀박질하듯 나온 춥고 우울한 계절임을 알려주는 징표로 나를 조금은 애잔하게도 한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대화는 미술과 문학 철학에 얽힌 거창하지 않는 사연을 담아 친지들의 근황으로 이어진다. 철학자B 또 F와 N, 시인 D, 화가 H 등의 이름이 언급되고 철학자 F의 새 책 이야기와 최근 행적들, 가끔 A와 G는 정치 이야기도 곁들인다. 그들은 파리에 머물면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샅샅이 훑듯이 다닌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M은 흥미로운 주제 앞에서 대화의 주도권과 그녀의 영역을 넓히려는 독단적 성향도 나타나고 어디에서 왔는지 날카로운 에너지는 분출한다. 그녀의 목감기는 도망을 갔을까, 쫓겨났는지, 그도 아니면 꿀병에 빠져버렸나?
나는 안달루시아 코르도바(Cordoba)에서 모스크* 내부를 걸으면서 마치 숲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자, M도 공감하며, 그들 부부가 몇십 년 전에 지금은 내전으로 위험지역이 되어버린 시리아에서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와 유사한 아름다운 모스크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었다고 한다. 나도 그 모스크에 방문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꼭 아니더라도 전쟁에서 제발 잘 버텨주기를 종교는 없지만 알라께 바랬다.
* 모스크-대성당 또는 메스키타(Mezquita de Cordoba)라고도 칭함, 코르도바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크고 유명한 유적지로 8세기 때 이슬람교도 모스크로 건축되었다가 13세기 때 내부의 일부분을 허물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되었음.(글 상단의 사진:모스크-대성당의 일부, 모스크의 기둥들임)
잠시 대화의 틈이 생기자 기품이 귀족적이고 사회성과 팀을 잘 이끌던 지도력을 발휘한 G가 '자 이제 작업실로 가보자?'라고 제안하자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내 작업실과 A의 작업실에서 차례대로 한동안씩 머물다 돌아와서 자연스럽게 저녁 식탁에 앉았다.
수년 전부터 오후 4시 이후 음식을 섭취하면 밤잠을 못 자는 M은 빈 접시 앞에서 꿀물만 마시고 정열을 다 하여 주도권을 놓지 않는 덕분으로 우리는 그녀의 유수 같은 수다에 포크와 나이프를 장단 맞춰 A가 준비한 조촐한 저녁을 천천히 맛있게 먹는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G는 내게 한국과 북한의 현 상황도, 한국 전통음악에 관해서도, 현재 그가 읽고 있다는 중국 공자사상과 한국 문화와의 연관성에 대한 질문도 아끼지 않고, 상형문자인지 잘못 쓴 글자인가 그림일까? 비틀거리는 하늘 천자가 적인 수첩을 내밀며 그 옆에 뜻글자 한글로 적어 달라 청한다.
내가 A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감흥과 울림은 그들의 대화 방식이나 주제다. 그들에게는 늘 그림과 음악 책 철학이 있다. 좋은 전시나 공연 그리고 세계를 망라하여 여행지에서 보고 경험한 다양한 문화다. 이렇게 쌓은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대화로써 나누고 공유한다.
A를 포함한 G와 그 주변 친구들은 하이데게리안(Heideggerien:독일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를 좋아하는 사람들)들이다. 따라서 철학은 대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공통 주제다. 하지만 그림에 열정을 바치는 M은 철학이 차지하는 큰 영역에 반발로 미술을 그 범위에 확장시키려 무던히 애쓰며 따라서 기회가 오면 주도권을 꼭 움켜쥐는 것이다.
M과 G를 비롯한 A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들이 읽었던 인상적인 좋은 책이나 전시 카탈로그들을 서로 빌려주고 선물도 한다. 철학자 B의 글이 담긴 노란 봉투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꾸준하게 우편으로 배달되고, 친구들은 여행지에서 엽서에 사인을 담아 우편으로 소식을 보낸다. 우리 집 다락에서 묶고 있는 각국의 직인 찍힌 우표가 붙은 유적지 그림엽서는 그들의 삶이고 문화다. 그중에도 우편 날인이 없는 수십여 장의 그림엽서는 M이 들고 온 것으로써, 카탈로그보다 무게가 적어 간편한 여행지의 선물이다.
가정사나 일에 관한 것은 안부차 아주 짧게 맺고 지나간다. 돈이나 물질적 과시는 격조와 품위가 떨어지는 소재라 아예 비껴 난다. (이것은 돈을 추하게 여긴 프랑스 전통 가톨릭 문화의 기반이기도 함.)
처음 나에게는 그들과 만나는 자리가 나의 무지를 확인하고 침묵을 강요받는 자리였고 그로 인하여 참으로 지루하고 힘들고 슬픈 시간이었다. 불어를 알아듣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모든 것이 생소한 것들이니 내게는 고된 과정이었다. 항상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는 나를 보는 그들은 동방 예의지국의 참신함으로 여겼겠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알아야 들린다. 그들이 웃으면 나는 아무 뜻도 모르고 자동으로 웃었다. 같이 웃어야 덜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이해도 못하고 대화에 끼지도 못하는 귀머거리 벙어리 신세로 아주 오랫동안 장애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알아야겠다는 호기심과 마음이 절실했고, 마냥 주변인으로 외톨이로 있을 수는 없었고, 함께 살아가야겠다는 생각과, 내 존재감에 갈망이 더 컸기 때문에 꾸준히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자리를 지켰다. 지금까지도 매 순간 깨달아 가며 경험하고 습득하여 부족하나마 지금은 오늘 저녁처럼 더불어 웃고 떠들기도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참 기나긴 시간이었다. 나와 M과의 관계처럼.
A가 책장에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무덤 너머의 기억들 /Mémoires d'outre-tombe> 한 권을 꺼내어 G에게 선물한다. 두 권이라는 말에 G도 흔쾌히 받는다.
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G를 위해 한국 전통음악을 틀었다. 장고와 대금 산조 곡이 아름다운 선율로 처연하게 이어지다가 점점 떨리는 가락으로, 애절하도록 낮게 끊어진 듯 그러다 힘차게 솟아올라 다시금 빠른 속도로 흐른다. 불빛에 비친 창밖의 대나무가 지나가는 돌풍에 꺾어질 듯 흔들린다.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이.
바람이 사그라진다.
단호한 한통의 전화 끝에 성사된 우리들의 만남은 이렇게 즐겁고 유쾌하게 지나간다.
익숙해서 편하지만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하는 여유로움이 있어 더 편안하고 유익한, 한 두 세대를 뛰어넘어도 친숙한 동료 같고 아름다운 고모 삼촌을 보는 듯 나에게서 가장 나이 든 푸근한 친구들이다.
한국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서편제>를 좋아하고, 그림과 아름다운 문화에 열정을 다하는 M,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많은 부분을 우리 부부와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기 좋아하는 M과 G, 그녀의 모 난 부분을, 그 날카로움에 찔린 모두에게 너그러운 웃음과 온화함으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태생답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M의 남편 G(그는 귀족 출신임), 항상 그녀 곁에서 박하사탕으로, 그의 곁에서 쵸코렛이 되어 우리 부부와도 함께 향기를 나누고 마신다.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