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 년 전 이야기 : S와 F를 만났다
어제도 꼭 이런 날씨였다. 모호하게 베일에 싸인 듯 온통 흰 수채물감을 풀어놓은 축축하고 뿌연 안개로 뒤덮인 조용한 토요일 아침, 왠지 그림 작업보다 소파 귀퉁이에 폭 파묻혀 차라리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어 지는 날씨다. 금요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친구들과의 상봉을 적어 볼까 한다.
A를 따라 그들을 만나러 샤틀레에 있는 카페 미스트랄 (le Mistral:프랑스 남쪽 지중해 연안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여기서는 카페 이름임)로 향했다.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갯속 장막을 조금씩 걷어내며 천천히 역에 도착했으나 기차는 연착되었고 뻥 뚫린 역 플랫폼에 서 있자니 날씨가 생각보다 더 쌀쌀했다. 습도를 잔뜩 머금은 안개가 지독한 암처럼 몸속으로 파고들어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낮 기온 영상 4도라는 일기예보에 따라 A의 표현대로 지나치게 호기 만발하여 활동하기 좀 편한 두껍지 않은 외투를 입은 탓이리라. 하지만 파리 중심가는 외곽지역보다 온도차가 언제나 이 삼도는 높으니까? 낙천적으로 기차에 올랐다.
레알 역에서 내렸다. 실내 중앙 광장에는 슈웨다곤 파고다처럼 솟구친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성탄트리가 뚫린 지붕을 가로질러 하늘에서 얕은 불을 반짝이고 있었다. 레알은 파리의 교통 중심지이자 상업밀집 지역이라 사시장철 많은 인파들로 벅적거리는 곳이다.
성탄절을 가족과 보내고 나들이하는 사람, 본격적인 겨울 정기세일 직전 부분 세일로 쇼핑하는 사람들이나 우리처럼 송년을 맞아 친구를 만나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웅성거렸다.
에스카레이트를 길게 타고 밖으로 나오니 다소 약해지긴 했으나 날씨는 여전히 차갑고 잔뜩 움츠리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싸늘하게 핥으며 스멀거리는 물안개도 아경에 그대로다. 레알에서 곧바로 가면 퐁피두 미술관이 나오지만 우리는 오른쪽으로 꺾어 센 강 쪽으로 걸었다. 이 길에는 볼 때마다 뜬금없다 생각되는 쥐약 파는 상점이 나온다. 아무렴 파리에 쥐들이 많다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주변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비싼 땅에 수지나 맞출지 분명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나지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킨 변함없음이 참 흥미롭고 진지하기도 하다. 더욱이 삶에 온화함을 느끼게 하나 망측스럽게도 상점 진열 창 위에서 수십 마리 거구 박제된 쥐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양새는 동물 박물관도 아니고 아무래도 쉽사리 적응되지 않아 지나칠 때마다 나는 '으' 소름 돋아한다.
지금은 파리의 칙칙한 예스러운 멋이나 개성 넘친 매력도 세월에 씻겨져 현대화로 파도치고 있지만 뜻하지 않는 곳에서 가끔씩 접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비롯 징그럽기는 하나 그마저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몇 걸음을 더 옮겨 놓으면 격조 있게 서있는 생-쟈크 탑이 슬그머니 시야로 들어온다. 16세기 초 고딕식 건축물로 그 예전에는 성당과 함께 있었겠으나 그 소멸된 자세한 원인은 밝혀진 바 없으니 외롭게도 우뚝 탑만 솟아 긴 보수공사 끝에 해 묶은 때를 말끔히 벗어 더욱 곱고 섬세하다.
우리는 습관대로 거리낌 없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차도를 가로지른다. 대다수의 파리지앵들은 횡단보도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 버릇이 있지만 그로 인해 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듣지도 역시 한 번도 목격한 바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파리에서는 운전자나 보행자도 각자도생이다.
사방으로 염염히 달리는 차량으로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겠으나 저기 멀찍이 도로와 연결되어 퐁 오 샹쥬 다리가 센강 위에 떠있다. 그전에 우선 종려나무 분수대가 중앙에 서 있는 크지 않는 샤틀레 광장이 나온다. 광장을 가운데로 왼쪽은 시립 극장 오른쪽으로 샤틀레 극장이다. 이 마주한 두 건물은 예술공연장인데 샤틀레 극장에서는 꾸준히 공연이 이어지나 이 년째 공사 중인 시립극장의 모든 공연은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이민을 떠나 굳게 닫힌 유리문 위에서 찢긴 포스트만 음산하게 날리고 있다. 시립극장과 나란히 붙어있는 카페가 오늘 우리의 약속 장소인 미스트랄이다.
미스트랄은 도로를 끼고 기역자로 확 트인 유리창이 있어 멋진 전망과 위치 교통까지 좋아 우리가 즐겨 찾는 카페 중 하나다. 정면으로는 센강이 흐르고 강 너머가 시테섬이다. 알다시피 노트르담 성당, 생 샤펠, 꽁시에르주리, 경시청 건물 등 이 모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시테섬에 자리하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의 발상지로 옛 파리의 요람이다. 카페 미스트랄 대각선 맞은편 다리 건너에는 삼각원뿔 타원형 지붕의 고딕식 건축물이 바로 그 유명한 프랑스 대혁명 때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기 직전까지 갇혀 있었던 침울한 역사를 말하는 곳이다. 이 꽁시에르주리는 파리 최초의 궁전에서 15세기부터 감옥 그리고 오늘날 재판소와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그 돋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센 강 위에서 고고하게 서 있다.
내가 이 건물에 역사적 아무런 예비지식 없이 처음 보았을 때 그 느낌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때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 사건보다도 더 이전 중세시대로 돌아가 억울한 누명을 쓴 어느 죄수가 저 조그만 창을 넘어 센 강에 뛰어드는 용감한 탈출을 상상하기도 또는 저 좁은 창을 뚫고 한줄기 밝고 투명한 햇빛이 어둠 속에 갇힌 죄수의 이마에 내려앉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아직 저 건물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 그 구조는 모르나 중세 고딕식 타원형 내부는 대체로 계단이나 특히 저곳은 그 규모를 짐작하여 근위병들이 주둔하는 감시탑으로 건축되었을 터인데 그때의 내 상상력이 너무 초현실주의 거나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무튼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숭고한 건축미는 한결같다.
멀리 도시 건물 너머에는 19세기에 건축가 귀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철조 건축물 에펠탑이 낮은 건물들을 밀어내고 교만하게 높이 솟아 여행객들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카페 미스트랄 창가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빼놓을 수 없는 풍경으로써 겨울밤이 긴 만큼 그 화려한 불빛도 더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다.
카페 미스트랄, 지금은 시립극장이 문을 닫아 덜 붐비지만 공연이 있는 날은 매우 북적하여 창가 좋은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일 년 정기권을 예약하여 저녁 8시 현대무용을 자주 보았다. A와 나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 카페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로 잠봉(jambon:훈제된 돼지 허벅지살)과 버터 발린 샌드위치에 한잔의 상세르(Sancerre:백포도주 이름)를 마시는 즐거움도 놓치지 않고 공연장으로 곧 잘 갔었다. 지금은 작고한 세계적인 독일 안무가 비나 보쉬(Pina Bausch)나 내가 좋아하는 벨기에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께스마께르(Anne Teresa De Keersmaeker) 역시 공연이 열리기 전 이 카페로 춤추듯 스며들어 뒤쪽 바에 서서 한잔의 커피나 포도주로 기력을 깨우는 모습도 보았다. 돌이켜 보니 지금은 그 마저 다 흩어져 버린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드디어 미스트랄에 들어서니 사람들과 음식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후끈하다. 점심식사 시간이라 당연하지만 여기저기서 접시에 부딪히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에 뒤엉켜 웅웅대는 알 수 없는 내용의 대화, 식욕을 마구 돋우게 하는 음식 냄새까지 참 요란하다.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센강 쪽 창가에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은 듯 4인용 빈 테이블이 후다닥 눈에 들어온다. 분망 한 가르숑(garçon:웨이터)의 안내를 기다릴 틈 없이 나는 발분 하여 빽빽한 테이블을 비집어 자리를 잡고 외투를 벗은 후 두 커플이 대각선으로 앉을 수 있도록 기획을 마친다. 우리는 메뉴판을 들고 무엇을 먹을까 미리 살피어 우리들이 좋아하는 꼬드 듀 혼느(côtes du Rhône) 적포도주로 당연 점찍어 둔다.
유리창 너머 시테섬을 배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의 움직임도 보도를 걷는 색색의 인종과 표정을 지켜보는 나 카페에 앉아 마치 극장에서 흐르는 영상 속의 장면을 훑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키가 아주 큰 커플이 도착하고 우리는 일어서서 몇 개월 만에 만난 서먹함도 없이 반가이 맞이한다.
나는 발 뒤꿈치를 가득 들고 그들은 허리를 낮춰 조화유 노엘 즐거운 성탄! S, 본 안네 좋은 해 되기를! F 하고 서로의 볼을 치대어 이미 지났으나 미처 못한 성탄인사와 새해인사로 일석이조를 와장창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