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교 그리고 프라하 성
세계 어느 도시나 그 한가운데 강, 바다를 끼고 물이 흐르는 곳이 아름답지 않은 데가 없다. 마찬가지 프라하도 파리의 센강, 런던의 템즈강처럼 도심을 가로질러 블타바 강이 흐른다.
오래전부터 유럽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했던 이 강 위에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까를교가 무구한 역사와 신화를 간직한 채 묵묵히 서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 긴 성곽으로 둘러 쌓인 프라하 성이 우아하게 양쪽 날개를 쫙 펼친 독수리처럼 잠연하게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프라하를 조명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써, 또 다른 그림엽서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문명의 결과물들은, 천년을 걸쳐 자연과 잘 어울려져 멋지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조화로움은 한낮에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고요한 어둠에 묻힌 밤의 풍경 역시 꿈속의 환상적 도시 같다.
까를교,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써, 1841년까지 말라 스트라나(Mala Strana, 구역 이름)와 구시가지를 잇는 유일한 이음표였다. 처음에는 돌다리라고 불렀지만, 1870년부터 까를교라 불린다.
이 까를교는 프라하에서 감탄적이고 놀랄만한 것 중 하나이며, 거의 신화적인, 차량통행 없이 도보만 가능한, 도시를 연결 짓는 하모니로써 유럽에서도 드문 경우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인다.
이 다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인 까를 4세의 통치 아래 1357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402년에 완성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357년 7월 9일 5시 31분. 왜냐하면, 135797531의 숫자는 회문(앞에서부터 바로 읽으나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으나 뜻이 통한다)으로써, 까를 4세 왕의 훌륭한 복점관(고대 로마 시대에 새의 울음소리, 또는 날아가는 방향 따위를 보고 나랏일의 길흉을 점치던 제사장이나 관리)이었던 천문학자들은 이 숫자가 길조라고 믿었었다.
까를교, 길이 621m, 너비가 약 10m, 16개의 아치형 상판으로 지탱되고 있다. 까를교를 지키는 세 개의 교탑 중 둘은 말라 스트라나에 있고, 하나는 스타레메스토(구시가지)에 있다. 이 구시가지에 있는 교탑은 1400년에 완성되어, 우아한 세련미와 함께 과부하 없이 놀랄만한 장식으로 고딕 건축 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고도 평가받는다.
다리 위 상판은 30개의 조각상이 각 기둥 위에 장식되어 있는데, 17세기까지 시대별로, 몇몇은 더 오래전 고딕식부터 계속 설치되어 대부분 바로크 양식으로 현저히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 이 많은 조각상은 복사품이며,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검게 옷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리지널이 정말로 지치고 낡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란다.
나는 여기서 프라하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데 베트랑급의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 들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탑을 비롯해 30여 개의 조각상에 덧입은 때를 말끔히 벗기지 않고 그대로 부분적 까맣게 두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방치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적당히 조정된 모습이었다. 그럼으로써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돋보이게 함은 물론, 돌출된 볼륨감과 함께 장식들 하나하나가 전설에 덧입혀져 괴기하면서도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또한 그 뒤로 배경처럼 이어지는 프라하의 빨간 기와와 연둣빛 구리 지붕들, 황금색 장식들을 마치 보석같이 돋보이게 함은 물론 대조적인 색상 조화가 아름답고도 우아하다. 그럼으로써 동화 속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과거 보헤미아 왕국으로 회귀한 듯도, 어쩌면 프라하의 마리오네트(인형극) 공연을 보는 달콤한 착각을 일으키게도 했다.
그리고는 아침해가 뜰 때, 낮과 밤, 이 다리에서 몇 번씩 때를 달리하여 걸어볼 것을 권한다. 그때마다 색다른 환상적 풍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건너편 다리에서 바라보는 것 역시 아름다운 까를교를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밤의 야색은 은은한 조명등과 더불어 낮 못지않게 로맨틱한 도시로 거듭난다.
사실, 도착 첫날 이 다리를 지날 때는 이토록 세부적인 아름다움까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가 않았다. '오, 역시나! 참으로 멋지구나'라는 포괄적 범위 정도에서 느끼고 생각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은연중 기대를 잔뜩 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에 앞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즐비할 줄 상상조차 못 했다.
물론 관광객이 몰려드는 성수기에는 무려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반시간이 걸리기도, 다리 위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 음악, 인형극, 거기에 소매치기까지 섞여서 관중들의 머리만 보일 때도 있다 하니, 그나마 과한 편은 아니라지만 내게는 과다했다.
그때 내가 느낀 까를교를 말한다면, 여행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기보다 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자주 이 다리를 보고, 지나다니며, 다양한 순간의 멋진 풍경을 맞이하기도, 멀치감치 또는 직접 곁에서 주의 깊게 바라보아 음미하여 흡수하면서 비로소 구체적인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도 차츰 바뀌어 갔다. 그 아름다움은 간접적 인지가 아닌, 한 겹씩 몸소 옷을 껴 입듯 겪어서 얻은 것이다. 그 기품의 황홀함은 보면 볼수록 그 매력에 자꾸만 빠져들었고, 급기야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리임에 틀림없다고 여겼다.
블타바 강은 까를교 위 신들의 수호 아래 힘차게 유동하며 흐른다. 그 기슭으로 아름답게 곡선을 그은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그 사이에서 맥주와 커피 잔이 강 쪽으로 쏟아져 내리고, 웅웅 거리는 여행객들의 조잘거림도 한갓되게 의란 속으로 사라진다. 그 유역에서 둥지를 튼 백조들을 맞이하며, 파랑에 튕겨 사선을 그어 언덕으로 사라지는 작은 새들, 그들의 지저귐도 말라 스트라나로 부터 초대를 받는다. 낭만적이고 시적이며, 사랑으로 가득 찬 골목길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기도, 다양한 통행로를 거쳐 멋진 궁전의 경계에서, 비밀 정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이곳은 블타바 강 왼쪽 편에 위치한, 까를교를 건너 작은 면에 속하는 말라 스트라나 구역이다. 까를교 오른편 강변에 카프카 박물관이 있고, 곧바로 올라 오른쪽에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도 있다. 그 안으로 필히 들어서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부 궁륭 천장, 저 높은 하늘에서 신과 아기 천사들의 다채로운 향연, 벽면에는 온통 은색과 붉은 벽돌로 꾸며져, 그 표면의 자연스러운 물결무늬, 다중적 정열적인 곡선, 그리고 황금색 장식, 이 조화와 화려함, 그 아름다움은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사용된 대리석은 최초의 인조석이라는데 아쉬움과 동시에 놀라웠다. 시간에 쫓긴 나는 문지기의 친절한 기다림이 미안해져 뒷걸음질 쳐 밀려 나오면서도 그 황홀함에 홀린 눈을 뗄 수가 없어 고개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이다. 아무려면 여기서 중요한 프라하 성을 빼놓을 수가 있겠는가. 이 오르막 길을 가다가 중간지점의 광장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힘겹게 무거운 종아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 물론 성까지 가는 길은 트람, 또는 케이블카 등 편리한 방법도 있지만, 이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순간들의 짜릿한 감성과 풍경을 맛볼 수가 있으라.
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카프카의 소설 <성>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여 그렸던 이미지와 너무나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소설 속 시대적 환경과 실재적 현 분위기에는 큰 격차가 있지만, 그 소설이 주는 모호하고 암담한 기분이 분명 그랬었다.
언제쯤 닿을지 도무지 측정할 수 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금방 닿을 듯했으나 다가갈수록 성의 형체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시간과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목적지, 성에 접근하기 위해 인내하는 힘겨운 과정. 어쩜 카프카가 이 성에서 영향을 받아 소설의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는 생각도 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프라하 성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코스 중 한 곳을 관람했다. 사실 미술관에 가려고 들어왔으나 알고 보니 미술관 입장은 별도였다. 그리하여 체코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오래되었다는 12세기 로마 양식의 성 조지 바질리카, 14세기 건립을 시작으로 600년에 걸쳐 완공된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 15세기 때 원형 대포 탑으로 지어져, 18세기에 지하 감옥으로 사용된 달리보르까, 그리고 황금 소로라고 고딕식 성벽에 지어 16세기 성 경비대와 수공업자들이 거주했던 작은 집들,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가 1916~1917년 집필을 했다던 22호. 그 길 위에서 <황금 소로>라 분명 한국어로 표기된 이정표를 보고 새삼 한국인의 발길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흥미롭게 실감했다.
프라하 성은 9세기에 이미 작은 군사적 요새였으나, 11세기에 들어서서 성곽으로 둘러싼 무장화된 진정한 성의 모습이 탄생되었고, 14세기 까를 4세에 의해 비로소 한 묶음의 전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이 성은 한 세기 후 주요 기념비적 고도로 거의 결정적인 차원을 획득하였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으로 18세기까지 거듭났다. 또한 성과 대성당에 변형의 작은 공사가 19세기까지도 멈추지를 않았다고 한다.
이 성은 함스부르크 왕조시대에는 왕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가, 1918년부터 대통령 집무실로 정부가 일부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곳을 제외한 일부분만 관람이 가능하다.
여기서 프라하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블타바 강을 사이에 두고 체코의 빨간 도시가 내 양팔에 안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본다.
그리고 언덕을 더 올라가면 스트라호프 수도원이 나온다. 과실나무와 전원이 펼쳐진 산책길을 택하여 걷는 것 또한 좋다. 수도원 옛날 도서관도 관광 코스지만 우리는 생략했다. 그보다 말라 스트라나 지역 곳곳을 걷고 싶었다. 성 건너편에는 르네상스 건축물인 안나 왕비의 여름궁전도 보인다.
아래 동네로 내려가면 프랑스를 비롯해 일본, 폴란드, 독일 등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멋진 건물들이 많을 뿐 아니라, 18세기 건축물들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관계로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또 존 레넌의 벽이라 불리는 곳도 관광 코스 중 하나, 슬쩍 눈도장만 찍고 지났다. 다양한 정치적 선언들, 그에 관한 풍자적 벽보가 붙어 유명세를 더했다는데, 우리가 지나갈 때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관한 벽보가 붙어있었다. 체코 역시 소비에띠끄 체제를 겪은 나라로써 지금의 우크라이나 상황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때 암울했던 그들의 기억은 분명 동병상련, 이심전심이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