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책 : 그림과 음악
일주일간의 여정 이모저모를 참 구구절절이 풀어헤쳐 긴 글을 엮은 것 같다. 그럼에도 빵부스러기처럼 기억 한 편 남아 있는 소소한 일화들. 그처럼 아름답고 볼거리가 적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불쾌함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던 도시의 인상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지리멸렬 길어진 개인적 경험담은 지루함을 넘어, 자칫 정보가 난무하게 왜곡되어 나쁜 영향의 선입견을 낳지 않을까 하는 염려 또한 없지 않다. 그러므로 문화 산책을 끝으로 프라하 기행을 아울러 맺기로 한다.
프라하에서, 솔직히 회화 부분에 있어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이롭게도 많은 작품들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반가웠다. 예를 들어, 이태리 르네상스 회화부터 익히 미술 교과서나 화집에서 자주 대하던 프랑스 인상파 대가들, 그 외 알려지지 않은 체코 작가들까지 유럽 회화가 두루 전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시민들의 문화, 예술적 소양을 엿볼 수 있는 계기였으며, 그 가치를 통해서 국격이 향상됨을 동시에 느꼈다. 비록 프랑스, 이탈리아 미술관들과 비견은 불가할 수도, 대가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대표작도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몰랐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과, 뜻깊게 몇몇의 경이로운 작품도 발견했다. 더구나 유명 관광지와는 다르게 관람객이 거의 없어 한 공간을 독차지해 충분히 심도 있는 감상으로 제대로 만족했다.
그러나 대가들의 걸작품은 각 미술관마다 두세 점씩 분리 전시되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각 미술관마다 입장료를 각각 따로 지불해야 했었다. 그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지불은 했지만, 마치 프라하 미술관의 호구가 된 느낌도 살짝 들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비해 걸작품은 물론 소장품의 다양성과 수효, 가치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장료는 결과적으로 훨씬 비싼 셈이다. 거기다 프라하 물가에 견주어 미술관은 아주 특별한, 호사스러운 공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훌륭한 작품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설령 호구지책을 강구하더라도 그게 우리 여행의 주된 목적이고 일이니까. 다음 기회란 올지도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첫 방문지 국립 현대 미술관은 1925년에서 1928년에 지은 근현대식 건물이다. 이 넓은 전시공간에서 관람객이라고는 우리를 포함한 두, 세명 때론 홀로 감상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인상주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피카소와 로뎅의 작품이 지배적으로 많았다. 이 두 작가가 엄청난 수효의 작품을 제작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토록 많은 작품이 소장되었다는 점에 가히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프라하 작가들의 작품도 많았으나 대부분 파리의 입체파 및 인상주의를 뒤쫓아 모방한 작품들로써, 예술적 가치보다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는 로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태껏 본 클림트 작품 중 가장 멋진 작품을 발견하기도, 시슬레의 아름다운 작품도 보았다. 또 평소 내가 클레 작품을 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클레와 앙드레 드랭 작품이 비교적 내 인상에 남기도 했으며, 클레의 템페라로 그린, 이 작은 크기의 추상 작품은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과는 달라서 내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또한 그동안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뭉크 작품을 만난 것도 뜻깊다. 그의 대표작 <절규>만이 오랫동안 내게 인지되어 왔는데, 빨간 지붕의 분홍빛 북유럽 풍경에서 가볍고 자유로운 터치와 환상적 색채가 새로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과는 별개로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 한적한 동네 분위기와 미술관 실내 카페에서 대학생들 틈에 끼어 커피와 계피향 나는 케이크 맛에 반했다는 점도 이 미술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한몫을 톡톡히 했다.
두 번째로 방문했던 미술관은 1698년 설립된, 유럽에서 루브르 박물관 다음으로 오래되었다는 스턴베르스키 궁전( Sternbersky palac) 국립 미술관이다. 지하층을 포함해 1. 2층으로 유럽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으나, 우리는 예상 밖의 실망감을 안고 나왔다. 몇몇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대가들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걸작은 아니었다. 그 낙담을 만회하고자 성 입구 맞은편의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팔레로 갔다. 친절한 직원 덕분에 기분은 약간 상승되었다.
이 감탄스러운 팔레는 1545-1567년 사이 건축된, 롭코비츠 왕좌로부터 1719년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취득하여 1948년까지 그의 가족이 머물렀다가 이후 공산주의 체제에 압수되었다.
이 국립 미술관은 지하층에서 1, 2, 3층까지 바로크와 르네상스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
뜻밖에도 우리는 리베라 <St Jerome 생 제롬, 1646>과 렘브란트 <연구실의 학자, 1634> 두 걸작을 만났다. 크지 않은 어두운 공간, 낮은 조명 아래 오직 이 두 작품만이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놀랍도록 우리의 시선을 순식간에 잡아끌었다. 미술관에는 그레코, 고야 등의 작품도 있지만, 이 두 작품이 단연코 압도적이었다.
심플한 구성, 엄중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 과부하 없는 무게감, 빛의 흐름에 따른 섬세하고 리얼리티 한 표현, 자유자재의 강한 터치, 이것들은 더욱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느낌을 주었다.
리베라 <St Jerome, 1646> 작품은 짙고 어두운 바탕 톤에 대비를 이루는 붉은 천과 흰색 두루마기 책자, 그리고 상체의 갈비뼈와 근육, 힘줄, 이 강렬함, 왼쪽 아래 보일 듯 말 듯 나타낸 사자, 이 전체적 짜임새와 구도, 색상, 표현, 어느 하나 성스럽고 황홀하지 않다 할 수가 없다.
그 옆으로 렘브란트 작품 <연구실의 학자, 1634>, 역시 그 특유의 고귀한 품격이 깃든 검정 톤은 언제 보아도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닌다. 또한 자유로움과 고상함, 풍만함, 신중함이 함께 어울려져 있다.
우리는 나란히 작품의 맞은편 벤치의자에 앉아 한동안 가슴 벅차오름을 느끼며 말도 잃은 채 감상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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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문했던 미술관은 성 안에 있는 Lobkiwiczky palac(롭코비츠키 팔라스)다. 체코의 가장 오래된 가톨릭 대 귀족의 거처로, 대체로 15세기-18세기 예술 소장품이 더욱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
Les Lobkowicz(레 롭코비츠)는 1939년 나치, 1948년 공산주의에 의해 두 번을 거듭 쫓겨나, 압수되었던 이 궁전은 2002년 비로소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그 시대 예술가의 후원자였던 Les Lobkowicz(레 롭코비츠)는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환영하여, 맞아 들었다. 따라서 이 미술관에는 작곡가의 많은 오리지널 악보가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경탄을 금치 못한 것은 피테르 브뤼겔 랑시앙(프랑스어;Pieter Bruegel l'Ancien)의 <건초 만들기, 1565년>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명한 풍경화 걸작은 12달을 주기로 6개의 시리즈 작품이다. 이 중 오늘날 5개의 작품만이 알려져 있는데, 그중 3점은 비엔나에 있고, 하나는 뉴욕, 그리고 나머지 한 점이 이곳에 있다. 우리는 이 한 점을 보기 위해 기필코 이 미술관을 찾은 것이다.
브뤼겔 <네덜란드 표기법으로는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Pieter Brueghel de Oude)>은 1525년에 태어나 1569년 브뤼셀에서 죽었다. 그의 성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서 삼았으며, 브라반트 공국의, 북유럽 대표적 르네상스 화가로서 풍경화 및 풍자적인 우화 작품을 그렸다.
브리겔의 풍경화는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자연 자체에서 인간 본성을 묘사했으며, 이 묘사는 풍경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알려진 작품은 총 45점(동판화 1점 포함) 있는데, 그중 이 시리즈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우리는 이 작품 앞에서 반시간 가량을 머물며 떠나지를 못했다. 한 부분이라도 놓칠세라 손과 눈으로 짚어가며 현미경으로 보듯 점 하나 소홀함 없이 보았다. 물론 관람객이 우리 둘 뿐이라 가능했었다. 이 작품은 걸작인 만큼 방 하나를 독차지해 벽 가운데에 걸려 있고, 나머지 시리즈 작품도 영상으로 설치돼 있다. 나는 그중 <겨울 풍경>을 오리지널로 보고 싶다는 충동에 비엔나를 다시 가야 할 이유가 더욱 뚜렷해졌다.
또한 새삼 몇 년 전 나폴리에서 본, 그가 죽기 일 년 전에 그렸던 <장님을 이끄는 장님, 1568년> 작품이 눈앞에서 겹쳐왔다. 그 어두운 풍자적 우화와는 반대로 풍요로움, 희망, 즐거움이 표현된 이 풍경화를 보면서 브뤼겔의 작품 세계를 펼쳐 알게 된 계기가 되어 기뻤다.
그의 두 아들 작품도 국립 미술관에 여러 점이 있으나 감히 아버지의 것에 견줄 수는 없었다.
주말 동안 비가 내렸다. 장애물은 아니었다. 비 오는 이틀간 우리는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잠시 여행객의 형국을 벗어나 현지인들 속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남편은 프라하 여행 결정과 거의 동시에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식>과 작곡가 벤베그의 심포니 21번 카디시(Kaddish) 공연을 예약했었다. 클래식 음악 하면, 독일과 그 주변국, 그리고 동유럽의 전통 음악까지, 프라하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도시답게 오페라와 음악의 도시가 아니던가. 특히나 파리에서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비싸기도 할뿐더러, 오페라 티켓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프라하에서 문화적 사치를 누려보는 것은 당연했다.
국립 극장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멀지 않은 블타바 강변에 있다. 풍부한 내부장식과 황금색 지붕의 매력적인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이다. 19세기 후반 국립 극장으로 건축되어, 지난 100년 역사에서 문화적인 중요성과 상징성의 중심에 있다.
프라하의 국립 오페라와 극장의 특징은 우선 크지 않아서 좋았다. 어느 자리에서도 불편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는 구조다. 시민들의 뛰어난 의식과 규범으로 격조 있고, 소박하며 친절했다. 솔직히 나는 오페라 공연보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더 좋았다.
유태계 폴란드 작곡가 Mieczystaw Weinberg(벤베그, 1919-1996)의 카디시(Kaddish,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곡은 그의 기억을 토대로 한, 약간 낭만적이지만 아름다운 곡이었다. 이층 발코니에서 노래하던 아름다운 소프라노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소리 같았다. 작곡가 벤베그는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Dmitri Chostakovitch(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06-1975) 아래서 그의 음악 세계를 펼쳤다. 이 곡은 그러니까 바르샤바 게토에서 모두 죽은 그의 가족에 대한 기억이다.
오페라는 오케스트라 공연과는 달리 먼저 그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 흥미롭게 쫓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대사는 이탈리아어, 자막은 영어와 체코어였다. 개탄스럽게도 영어 문맹에 다름없는 내게는 3시간의 공연은 길고 때로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피가로의 결혼식>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이력으로 대략 그 내용을 쫓아갈 수가 있었기에 최악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순간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웠다. 비 오는 날 저기압 탓이라 위안 삼았다. 멋진 공연이라 찬사를 금치 못하는 남편에게, 나는 수잔 역을 맡는 일본 여성에 더 큰 관심을 보냈다.
이 국립 오페라는 1041년에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발레와 오페라 극단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는, 유럽 최고의 중요한 오페라들 가운데 하나다. 더 주목할 점은,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식>이 바로 이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성황을 이루어 출세했으며, 그의 오페라 <돈고바니> 또한 여기서 최초로 막을 올려 성공을 이룬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장소다. 역시 오페라의 도시, 프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