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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Mar 03. 2023

나의 이야기 4

그렇게 프랑스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세상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열린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도 그와 마찬가지다.


나는 그로부터 분야나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닥치는 대로 무작정 습득해 나갔다. 이 모든 생소한 것들이 내게는 신세계처럼 다가왔고 놀랍고도 신선했다. 삶의 자극제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 속에 자리 잡는 생각은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내가 프랑스에서 잘 살아가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남편과의 대화는 물론 그의 친구들과도 교감하며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대화 중에 매 순간 끼어들며 보충 설명을 바랄 수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지 않은가.

프랑스인들의 식사자리는 대화의 장과 같아서 정치, 문화, 예술 등 다방면의 주제가 화젯거리로 올려진다. 특히 당시에 진행되는 전시, 공연 같은 문화가 우리들의 식탁에서는 빠질 수 없다. 내 의견이나 발언 따윈 언감생심 적어도 기본적인 지식만이라도 알아야만 했다. 비록 불어 능력이 짧더라도 약간의 줄거리나 분위기 파악으로도 그 자리가 지루하지 않은 법이니까. 만약 무지한 상태로 그 자리에 앉아있다면 즐겁고 편하기보다 괴롭고 지루한 가시방석이 될 뿐이다.

나는 이와 같이 오랜 시간을 귀머거리가 되었고 벙어리처럼 살아왔다. 조용히 앉아서 자리만 지켰다. 말없이 듣기만 했다. 천연덕스럽게도 신중한 척, 조신한 척,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으로 행동했다. 때로는 이해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아는 척 자존심을 챙겼다. 소견은커녕 언어 실력이 엉망이라 듣고 이해하기조차 힘들었다. 따라서 아는 것도 없으니 불편한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타국살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란 생각도 했다. 그래서 목마른 놈이 우물 파듯 손에 잡히는 대로 경험하고 알려고 노력했다. 얼른 이 막막한 순간을 벗어나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프랑스의 생활 속으로, 프랑스 문화에 젖어들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지금도 가끔, 아니 자주, 가시밭길을 걷는다는 그런 순간의 느낌이 없지도 않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서 좋고 아름다운 것과 아닌 것에 대한 변별력을 가지게도 되었다. 특별히 내가 선호하는 안무가의 작품이 생겨나기도, 구별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내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은 벨기에 현대무용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Anne Teresa De Keersmaeker>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내가 추구하던 그림과 같은 미니멀한 감각적 아름다움이 보였다. 거창하고 현혹적인 장식이나 미사여구 없이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미와 함께 자유로운 질서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작품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받기도, 동질감을 느끼기도, 또는 내 작업 방향에 대한 확신을 얻기도 했다.

또 러시아 감독 타르코프스키(tarkovski)의 영화 <희생>과 <안드레이 루브로프>, <솔라리스> 등을 비롯하여 소쿠로프(Sokurov) 감독의 <농부의 비가>, <영혼의 목소리>, 인도의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감독, 그리고 조지아의 파라자노프(Paradjanov), 일본의 오즈(Ozu) 감독의 영화들을 감동적으로 보았다.

사티야지트 레이 영화 <아푸>3부작을 보는 동안은 주인공 아푸의 삶에 감정이입되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소쿠로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서 리스본 여행을 결심하기도, 파라자노프의 영화를 본 후에는 조지아 여행을 꿈꾸었다.

특히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브로프> 영화가 탄생된 러시아 블라디미르주에 있는 고대, 중세도시 수즈달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도 잊지 못한다. 이 전원적이고 영적인 도시의 하늘을 가득 수놓은 양파모양 돔형식의 교회 지붕들. 황금색, 파란색, 녹색, 검은색, 하얀색들이 공중에 아름답게 떠 있었다. 이 도시는 마치 그의 영화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 영화가 당연히 탄생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적 환경이다. 이 공기, 이 분위기가 예술작품을 낳게 하는 근원이며 주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사람을 섬세하게도 감각적 이게도 만든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인간이 만든 환경은 인간을 지배하기도, 받기도 한다.

그리고는 배용균 감독의 <달라이나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내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말에 살짝 놀라던 남편이 즉각 추천했다. 그리고는 그의 친구가 녹화해 놓은 테이프를 빌려와서 보여주었다.

또 이 다양하고 세계적인 문화, 예술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내 작품에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프랑스의 현존하는 화가 삐에르 부라글리오(Pierre Buraglio)의 작품이다.

우리 집 거실벽에는 남편이 결혼 전부터 소장하던 이 작가의 리토그래픽 한 점이 걸러있다. 나는 남편의 스승이나 친구들이 멋지다고 말했을 때도, 그 이후도, 솔직히 왜 좋은지를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래서 처음 우리 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자랑삼아 보여주기도 한다. 단 2점의 인쇄 중 첫 번째 작품이라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그리고 내가 20년 전 남편과 함께 처음 본 전시가 바로 이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남편이 먼저 그의 전시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작가인지 전혀 몰랐다. 내가 아는 작가의 부류는 아니었다. 사실 당시 내가 알던 작가는 대체로 당대 유행을 이끌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었다.

우리는 전시장에 도착했고, 작품은 여러 방으로 나눠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림의 표현이 너무 생소했다. 시적이며,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는 듯 어려웠고, 깊은 뜻이 있는 듯 오리무중이었다. 쉽게 다가오기는커녕 왜 남편을 포함한 애호가들이 좋아하는지 조차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난해한 설치미술이나 개념미술도 아니었다. 오직 순수 현대 미술이다.

그 이후 나는 그의 전시가 열릴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보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부터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매료되어 갔다. 감상이 아니라 작품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실은 자주 보면서 느껴야 했던 것이다.

이 작가 작품은 아주 절제된 표현으로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다. 단지 세리그래픽 틀이나 유리가 낀 창틀을 갖다 놓아도, 또는 종이를 잘라 놓아도, 선을 그어도 그의 독특한 표현은 살아서 숨을 쉰다. 기묘하게도 세련되고 멋스럽다. 아주 기발하면서도 고상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결코 대중적인 시각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적인 그림이기 때문에 대체로 미술 전문가나 미적 기호가들이 좋아한다.

그 후 한때 나는 그의 세련된 미를 추구하여, 그의 작품을 흉내 내어 표현해 보기도 했었다. 가장 파리적이고 프랑스 풍의 감각이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가로질러가야만이 내가 원하는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의 세련된 감각적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나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게도 되었다. 물론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나.

나의 작품에서 그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를지라도 내가 추구하던 오리기와 이어 붙이기 그리고 집합 등은 그와 연결되는 유사점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작품이 내 확고한 방향을 구체화시키며 고착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술가란 비록 처음에는 모방으로 시작할지언정, 결국은 자신만의 개별적 색깔과 예술성을 찾아야만 한다. 남의 것을 흉내 낸 모작은 창작도 예술도 아닌, 습작일 뿐이다. 물론 그 습작의 과정도 불필요한 건 절대 아니다. 많은 대가들도 그 과정을 거쳐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정일 뿐 결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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