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뀜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새로운 계획이 생겼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의 외출과 더불어 파리에 있는 모든 뮈제(Musée;미술관, 박물관을 통틀어 칭함)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미술관람 위주로 다녔는가 하면 이제부터는 그 장르를 불문하고 크고 작은 박물관을 두루 섭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파리에는 실히 200여 개가 넘는 뮈제들이 3개의 범주(카테고리)에 따라 국립, 시립, 그리고 사립으로 나뉘어 존재한다. 이중 널리 잘 알려진 세계적인 박물관 루브르와 오르세, 퐁피듀 센터를 비롯해 우리가 아는 것 외에도, 아직 모르는 것들까지 프랑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만으로도 무려 96개에 이른다. 또한 파리 근교의 것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주제와 종류도 꽤나 다양해서 구미를 당길 뿐 아니라 다방면의 문화적 지식을 쌓기에도 충분히 흥미롭다. 가령 예술, 장식, 건축, 역사, 자연, 과학, 해양, 인류, 동물, 무기, 포도주, 유리... 등.
우리의 일상생활은 집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너무 많고 길다. 우리의 일터인 작업실이 집 안에 있다 보니 매일 집으로 출근하고 집에서 퇴근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활동 범위가 극히 좁기 마련이다. 평소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일과 슈퍼마켓 가는 일 외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결코 외출다운 외출이 아니다.
그럼 나에게 외출은 무엇인가? 그것은 향수를 살짝 뿌리는 정도 곱게 몸단장을 함과 동시에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다. 최소한 반나절 가량 집과 일터를 떠나 긴장을 풀고 틀에 갇힌 일상의 리듬을 깨부수는가 하면 색다른 사건을 유입시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처럼 나를 정화시키는 시간이다.
사실상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외출의 기회도 줄어든다. 그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친인척 및 친구들이 이사를 가거나 세상을 떠나고, 또 우리들의 물리적 활동력이 떨어지면서 서로 간 접촉의 횟수도 감소되었다. 따라서 식사자리도, 초대도, 모임도 점점 뜸하면서 소홀하고 등한시되었다. 그리고 본의든 타의든 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차츰 결여되고 줄어들면서, 그만큼 사회적 가장자리로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성이 뛰어나 자청해서 아무 모임에 쫓아다닌다거나 특별한 목적 없이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쇼핑을 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하다 보니 겨울이 되면 외출에 대한 절박함은 언제나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나태한 마음이 곰팡이처럼 슬그머니 파고들어 속절없이 주저앉고 만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더욱 악성으로 활기차게 변하여 아주 쉽게 우리의 의지를 꺾어버림으로써 외출을 위해 씻고 옷을 갈아입는 준비과정조차 번거롭게 느껴진다. 따라서 현관문 밖은 마치 DMZ 같이 느껴질뿐더러 문지방을 넘기가 행성만큼 멀고도 힘겨웠다. 이렇게 하루이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생활이 반복되면서 자꾸 외출을 미루다 보면 일주일 넘게 뱅글뱅글 집 안에서 쳇바퀴 도는 꼴이 된다. 급기야 운동부족으로 몸의 균형이 깨어지는가 하면 무기력한 일상으로 습관화되기 일쑤다. 또한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쌓여 짜증 내는 횟수가 잦아들고 마침내 우울증세까지 나타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정신적, 육체적인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진취적이고 다이내믹한 생활을 습관화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스스로를 다소 압박하고 강요하는 뜻에서 특별히 외출에 대한 목적과 수단의 좋은 빌미를 찾아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리에 있는 박물관 모두를 그 목적지로 삼았다. 참으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좋은 변명의 핑곗거리라고 생각된다. 꿩 잡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나들이다.
사실 그동안 외출에 대한 필요성을 수없이 논의하면서도 매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늘 계획을 세우고 다짐도 반복했으나 번번이 작심삼일로 끝나버렸다. 그 이유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하나 모두 핑계일 뿐. 그 무엇보다 부족한 우리의 의지력이 문제였다. 그리고 강한 동기부여가 없었다는 점과 매력적인 목적을 찾지 못했다는 게 또 하나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그러므로 무의미하게 나가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구체적인 근거와 까닭을 만들어 유익한 방향의 외출이 되기를 바랐고 비로소 찾았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계획이 이전처럼 작심삼일로 끝나버리지 않기를 마음속 응원하며, 꾸준히 이루어지도록 기대치 또한 높여 본다.
비록 200여 개의 뮈제를 다 탐색하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프랑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 중 우리의 관심사에 들어오는 절반이라도 둘러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뮈제 방문, 솔직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외출의 핑계가, 핑곗거리 외출이 있을까? 적은 경비로 적잖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곳. 우리 취향에도 더할 나위 없이 알맞고 필요한 정당화된 장소다. 아낌없이 누리고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여가다. 하물며 어떤 이는 멀리서 경비를 지출해 가면서도 찾아오는데 어찌 지척에 두고 마다하겠는가. 더구나 우리에게는 국, 시립 박물관 무료입장은 물론 경우에 따라 사립에서도 할인 가능한 예술 협회 회원 카드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혜택과 함께 이 풍성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어찌 어리 섞다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하나 더 놓칠 수 없는 점은 전시 관람을 위해 박물관에서 걷는 도보수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과 함께 처음으로 그 목적지를 마레지구에 있는 카르나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으로 삼았다. 이 박물관은 파리 역사에 관하여 전시된 곳이다.
특별히 이곳을 택한 이유는, 먼저 중심가에 있어 교통편이 편리하다는 점과 17세기, 18세기 건축물과 옛 풍취를 간직한 작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고풍스러운 멋을 느낄 수 있으며, 차량이 거의 없어 걷기에 딱 좋은, 봄날의 나들이로 금상첨화, 멋진 동네이기 때문이다.
이 구역을 말할 것 같으면 현재는 그 색깔이 다소 옅어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게 역력히 드러난 곳이었다. 특히 거리에서 게이들의 모습은 아주 쉽게, 자주, 흔쾌히 목격되었고, 그들이 드나들던 독특한 분위기를 띤 술집이나 스탠드바가 많아서 더욱 유명했다.
긴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오후 나절의 골목골목마다는 밀물처럼 밀려든 인파들로 만개한 철쭉꽃을 보는 것 같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임에도 거리에는 얇은 차림새를 마다하지 않고 화사한 모습의 자유로운 생기가 쏟아져 분방하다. 삼삼오오 가족과 친구 및 연인들의 발걸음은 세련된 상점들이 늘어선 인도를 따라 풀린 나사처럼 왁자지껄 낭창하게 움직인다. 마치 이 보보의 동네를 더욱 뽐내기라도 하듯이 자신들의 매력을 맘껏 담아 뿜어내고 있다.
카페마다 노천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다. 평일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선남선녀들이 하늘을 이고 약간 드러낸 종아리를 섹시하게 꼬아 테이블 옆으로 비틀어 우아하게 앉아서 백포도주잔을 앞에 놓고 휴일 저녁의 자유로움에 취하는 모습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파리 보보(BoBo;Bourgeois-Bohème 부르주와-보헤미안의 줄임말)들의 삶이 깃든, 독특한 마레 지구의 경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