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나 김선자 Feb 24. 2023

나의 이야기 3

감각적인 세계가 넓혀졌다.



마침내 나는 불혹을 넘은 나이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우중충한 회색빛 무거운 하늘이 차가운 습기를 가득 머금고 지붕 위에서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러 있던 전형적인 파리의 겨울. 내 하얀 코르사주가 유일하게도 더욱 하얗게 빛나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파리 1 대학 조형예술학과 박사과정과 동시에 미학 박사 준비과정을 막 시작한 학생이었다. 따라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 저축해 놓았던 돈은 몇 년간 유학생활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에 금융위기, IMF 사태를 맞아 원화 가치가 바닥을 치고 있던 때였으므로 젊은 나이에 적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돈이 가치를 다 발휘하기는커녕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수돗물처럼 통장에서 술술 새어나갔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가 내 결혼을 결정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시절의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데 대한 두려움도, 고민도,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았었다. 자신감이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기보다 어쩌면 앞뒤 상황을 깊이 있게 고려하지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나이가 중년의 늙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공부를 마치는 게 목적이었다. 또 '설마 굶어 죽기야 할까, 행운이 결코 나를 비켜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막연하지만 희망적으로 생각했었다. 나의 이 낙천적인 사고가 때에 따라서는 다소 무모하고 무지할지언정, 내가 가진 크나큰 용기이기도, 또 어떤 것에 대한 결단과 도전을 위하여 좋은 무기가 되는 힘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나의 도약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었다.

더 확실한 건 물질적 또는 사회적인 명성 따위를 크게 부러워하거나, 바라고 기대하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욕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남을 의식하여 내 인생을 설계하지는 않았다. 절대적으로 그것만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 보다도 그림, 예술이 차지하는 정신적 가치의 영역이 내게 너무나 크고, 넓고, 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가장 탐하던 것이고, 비전이었다.

또한 공부를 마치고 오면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던 어느 대학 결정자 가족과의 대화내용을 내 가족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도, 그 또한 확정된 사실이 아니듯이 그 막연한 말에 기대를 걸거나 흔들리지도 않았었다. 따라서 그걸 위해 누구의 구두를 억지로 닦는 비열한 짓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것은 결혼과 동시에 한국 사회와 떨어져 프랑스에서 정착한 덕택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처럼 사회적인 명성이나 출세, 경제적, 물질적 추구를 위하여 지금까지 아첨꾼 노릇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에 자부심도 가진다. 그 덕분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천성이고, 기질이며, 성격이다. 비록 이 성격 때문에 더 쉽고 편리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을망정, 자긍심을 가지고 순수미술 작업에 임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남편이 내 구세주가 된 셈이다. 또 내 예술 세계를 확장시켜 펼쳐나갈 수 있는데 큰 힘이고 지지대다.


남편을 만난 이후,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내 감각적 세계가 넓혀졌다. 솔직이 말하면, 수년간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구체적인 것들을 그의 곁에서 직접적으로 체득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며 나와 함께 즐기기를 원했다. 좋은 전시가 열린다던지, 훌륭한 작품이 소장된 곳은 거리를 불문하고 찾아갔다. 또 미술전시는 물론, 음악, 무용, 영화, 문학 그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성 있고 좋은 것들은 끊임없이 추천했다. 전시장에서는 언제나 좋은 작품들을 콕 찍어 주면서 다시 보고 유심히 감상하기를 은근슬쩍 권했다. 그는 그렇게 사랑과 애정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나 역시 막무가내 닥치는 대로 습득해 나갔다.

그러나 가끔은 그가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했지만, 그에게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에 스스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욱 애쓰며 달렸다. 보고 배워 내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단계에 이르고, 때로는 뛰어넘고도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식 시각으로 비좁은 세계에서 살아왔음을 적나라하게 실감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앎을 위해서는 저항 없이, 기꺼이 세계 곳곳을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게 쫓아다녔다.

따라서 남편은 내게 좋은 스승이고, 후원자이며, 안내자였다. 그는 미적 기호가 남다르기도 하지만, 문화 예술에 있어 세계의 중심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에 나보다 훨씬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적 지식과 소산을 지닌다. 감히 나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그를 통해 가장 먼저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이데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편의 스승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인 철학가 프랑소와 페디에와 브장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철학 강연을 들으러 남편을 따라다니며 언어의 장벽을 무릅쓰고 끈기 있게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이해는커녕 언제나 귓전에서 윙윙거렸지만, 단어 하나라도 주워 담아보려는 욕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또 남편이 좋아하는 프랑스 현대시인 도미니크 푸카드(D. Fourcade, 1938~)를 비롯한 러시아 시인 만델스탐(Mandelstam)과 아크마토바(Akhmatova) 등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예전부터 러시아 문학을 참 좋아하던 관계로 그들을 만나러 러시아로 갔다. 우리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내려 푸스킨 박물관과 톨스토이 생가를 방문하기도, 생-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만델스탐 시인이 살았던 곳을 찾기도, 아크마토바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다음날 우리는 아크마토마의 무덤을 찾아 기차를 타고 핀란드 국경 가까이에서 내렸다. 헬싱키행 기차가 눈앞에서 쌩하고 지나갔다. 하늘로 향해 빽빽하게 치솟아 오른 전나무 숲 속의 한적한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남편은 조용히 한 줌의 들꽃을 꺾어 들었다. 아무렴 러시아 북쪽 한여름 숲 속 날씨지만 걷어오는 동안 막 시들어 가던 그 꽃을 소박한 무덤에 올려놓고 경의를 표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이처럼 그의 소소한 행동 하나에서도 그의 고상한 품성과 문화적 품위가 느껴졌고, 그 감성이 나에게 조금씩 전이되어 내 감각적 세계를 일깨우며 확장시켰다. 이 말없이 이루어지던 행위들조차 내게서는 은연중에 그와 같은 프랑스의 색깔처럼 서서히 물들어 갔다.

그리고 미국의 현대무용 안무가, 지금은 작고하신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독일의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그리고 벨기에의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작품을 좋아하여 열광하게도 되었다.

우리는 남태평양으로 떠나기 전 약 10년 동안 매년 정기권을 예약해서 현대무용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중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머스 커닝햄 공연을 보던 날이다. 왜냐하면, 내가 현대무용 공연을 처음 본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때 내가 느꼈던 미적 기호와 지금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남편은 결혼 전에 내게 자신의 예약된 공연 티켓을 준 적이 있다. 머스 커닝햄의 공연이었다. 사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연을 보러 갔다. 그 공연장 안에서 내 눈에 들어온 반경 내에서는 동양인이 나 혼자 뿐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아,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저녁시간을 보내는구나' 생각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공부만이 삶의 향상이라 여겼던 유학생에게는 너무나 여유롭고도 부러운 모습이었다. 물론 세계적인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지만(나중에 알았음), 파리지앵들의 문화적 취향에 놀라웠다. 그 넓은 공연장은 평일 저녁임에도 빈틈없이 꽉 찼고, 이러한 공연이 거의 매일 열렸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공연장은 파리에서만도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솔직이 내게 최악의 날이기도 했다. 약 두 시간 동안의 현대 무용은 내게 꼼짝없이 앉아서 받는 형벌 같았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느라고 죽을 듯이 괴로웠다. 옆사람이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무진장 애를 써 보았으나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과 꺾어지는 목은 어쩔 수가 없었다. 꾸벅꾸벅거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면 능청스레 아닌 척 딴전을 피우기도 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수치심이 차올랐다. 이것은 논문을 쓰느라 피곤하고 허약한 건강 탓도 있었지만, 현대무용에 대한 무지함이 더 큰 원인이기도 했다. 그 무지가 지루함을 낳았고, 다시 졸음을 불러왔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이야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