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역사박물관이다
카르나발레(Carnavalet)는 파리시가 설립하여 운영 관리되는 시립 박물관이다. 5년 동안의 긴 공사를 마치고 2021년 봄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방문할 생각조차 못했을뿐더러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이 박물관은 16세기 건축된 카르나발레 호텔과 17세기에 건축된 호텔 르 팔레티에 드 생-파르고(Hôtel Le Peletier de Saint-Fargeau)와 함께 합쳐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말, 파리 도시계획을 맡았던 오스만(Haussmann) 남작이 역사박물관 건립을 조직함으로써 파리시가 1866년에 카르나발레 건물을 사들었고 1880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1980년대 와서 기존의 건물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바로 옆 건물인 르 펠레티에 드 생-파르고 호텔과 결합해 1989년에 재 개관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프랑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거나 박물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호텔(l'hôtel;거대한 저택을 일컬음))들은 예전에 귀족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러나 1789년 파리 혁명 이후 귀족들의 몰락과 동시에 본의든 타의든 국가에다 직, 간접으로 기증되었거나 국가가 사들인 것이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박물관 입구를 지키며 서 있는 경비원들을 비껴 나 호텔의 큰 대문을 들어서면 포석이 깔린 마당이 나온다. 그 중앙에 루이 14세의 조각상이 서있다. 중앙에 마당을 두고 삼면으로 16세기에 지어진 3층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멋스럽게 다가온다. 넓고 큰 창문들은 딱딱하지도 답답하지도 않게 활짝 열린 느낌을 주면서 그 사이사이 측면 2층에 새겨진 멋진 부조상들이 단조로움을 없애는 동시에 우아한 건축미를 돋보이게 한다.
박물관 입장은 무료다. 여행객 유치를 위해서인지 문화생활 보편화 차원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까닭에 누구든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보니 적지 않은 관람객과 그들의 어수선하고 진중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약간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전시관에는 갈로-로마(gallo-romain)부터 중세, 그리고 프랑스혁명, 19세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전 역사가 펼쳐져 있다. 지하층부터 3층까지 총 3,900제곱미터의 표면에 길이가 1.5킬로 미터로 34개의 방을 두고, 그림을 비롯한 조각, 사진, 뎃상, 인쇄물, 장식, 가구, 오브젯 및 고고학적 소장품과 자료를 포함해 무려 625,000점의 소장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 수없이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프랑스혁명에 대한 사료들이다. 사실상 놀랄 일도 아니다. 그만큼 프랑스 역사상 매우 중요하고 의미 깊은 사건으로 오늘날 공화국으로서의 사회와 문화를 형성한 동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년 혁명기념일을 맞는 7월 14일 밤과 전야에 자유, 평등, 박애의 표징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프랑스 방방곡곡 전 하늘을 오색 빛으로 수놓는다. 그 폭죽 터지는 소리가 대 장관을 이루며 우리의 의식을 다시 일깨우게 한다.
전시장에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 또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혁명가들 및 그 이후 이어지는 파리역사에 관한 내용들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 콩코드 광장에서 처형되기 직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품이지만 광장 중앙에 하늘높이 치솟은 처형대의 모습과 그 곁에 끌러 나온 루이 16세 왕의 모습이 새삼 적나라하다.
그 아래 그림은 그보다 약 9개월 늦은 1793년 10월 16일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쥬 감옥에서 처형대로 이끌려 나가면서 고개를 당당히 들고 경비병들에 앞서 문을 나서는 모습이다. 이 그림 역시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비단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매우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전시된 수천 년 역사의 다종한 산물들을 모두 기억하여 나열하기란 어렵고 불가능하므로 내 눈길을 끈 몇몇 종류와 흥미로웠던 몇 가지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넓은 전시관에 들어서면, 옛 파리 건물과 상점들에 부착되었던, 일종의 오늘날간판 역할을 했던 입체적 구조물 엉쎄느(les enseignes)들이다. 가령 정육점을 알리는 소가 그려진 도형, 쥐약 또는 쥐를 퇴치하는 물건을 팔았음직한 쥐 그림, 재단사나 양복점을 상징하는 가위, 그리고 빵, 포도, 말형상 등. 그리고 무슨 가게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고급 또는 품위나 권위를 상징했음직한 왕관도 보인다. 무엇보다 유태인의 상점임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 표기가 눈에 많이 띄었다. 이 점은 유태인들이 상업에 많이 종사했음을 뜻한다. 이 개성적인 하나하나의 조형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각각이 속한 직종도 분명히 알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취향이나 자부심까지 느끼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규모만으로도 가히 상점의 범위나 번영까지 미루어 짐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사용되는 평면 간판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정교하고도 예술적이며 장인정신이 깃든 입체적 구조물로 글과 이미지, 아니 글보다 더 상징적이면서도 낭만적이었다. 특히 이미지 형상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당시 아마 글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과 가게를 드나드는 고객이 대체로 하인이나 하류층, 서민층이었다는 것도 유추해 본다.
또한 위트가 넘치면서도 날카롭고 정확한 표현의 형상은 흡사 조각가의 작품 못지않았고, 그 수제품은 충분히 하나의 오브젯으로써 가게를 돋보이게 하는 가치를 넘어 장식적 효과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센강의 유람선 일명 최초의 바토무슈 모형이다.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으로 바퀴가 달린 장애인용 휠체어, 지금으로부터 무려 250여 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감탄과 더불어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피에르 르메트르> 소설 <화재의 색> 속 장애인 <폴>이 바퀴 달린 부피 큰 의자가 좁은 문을 통과하기 힘들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여러 개의 전시실을 차지한 19세기때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의 방과 가구, 장식들이 있었고, 또 파리 센강에 최초의 철조 구조물로 건축된 예술의 다리 모형과 인권법 선언문, 군사훈련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혁명의 축제가 열렸던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 루이 14세 왕의 방에서 발견했다는 우유를 담는 병... 등.
역시 꽤나 흥미롭고 매우 인상적이게 내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사형제도를 처음 도입한 조셉-이니아스 기요탕(Joseph-Ignace Guillotin, 1738-1814)과 처형 기구를 발명한 의사 앙투앙 루이(Antoine Louis)다. 그들의 성을 따 사형제도를 <기요틴느, Guillotine>라 하고 처형 도구를 <루이종, louison>이라 부른다. 파리 사법부의 대리인으로 선출된 의사 기요땅은 1789년 10월에 모두를 위해 단일한 집행방식을 제안하며 형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앙투앙 루이가 사형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루이종이라는 기계를 만들어 1792년부터 참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제도에 따라 루이 16세 왕과 왕비 마리 앙투안네트가 참수된다.
여기서 내가 잔인하고도 참 아이러니하게 느낀 것은 루이 16세 왕과 왕비 마리 앙투안네트의 목이 거꾸로 매달린 형상의 귀걸이가 만들어져 루이종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해 놓았다는 점이다. 두 개의 귀걸이 중 오른쪽은 눈을 감고 있는 루이 16세의 머리 형상, 왼쪽은 눈을 뜬 마리 앙투아네트 머리 형상이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무척 갈증을 느꼈다.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여볼까 생각하고 들어갈 때 이미 눈여겨보았던 입구 반대편 안뜰의 카페를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저녁해가 떨어져 서늘한 바람까지 몰고 왔다. 가벼운 차림새가 밖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기에는 조금 움츠려드는 날씨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러나 꼭 다시 들러보고 싶은 멋스러운 조용한 박물관 안뜰의 카페. 다음에 들러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