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밤길을 걸었다

비에 젖은 파리의 밤길을 걸으며...

by 다나 김선자



어제 오후 늦게 파리 시내를 나갔어요. 내 조그만 작품 하나 출품해서 단체 전시하는 게 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오픈날 참석을 못했어요. 불참석에 소홀했다는 기분도 풀 겸, 어떤 작품들이 어떻게 전시되었나 하고 알랑과 함께 나가 봤어요. 다른 미루었던 일도 겸사겸사 볼 양이었지요.

우리는 지하철 낫시옹(Nation) 역에 내렸어요.

이므블르-앙듀스튜리엘(Immeubles-Industriels) 가에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그곳 한 젊은 관계자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잠시 나누고 우리는 다른 일정으로 서둘러 나왔어요.

대로를 가로질러 차량이 적은 레옹 프호(Léon Frot) 길을 들어섰어요. 이 길 중간쯤에 일본 친구 아뜰리에가 있지요. 음악소리가 흘려 나와 우리는 노크를 했어요. 마침 그는 색소폰 연습 중이더군요. 잠시 들러서 그의 색소폰 연주에 관한 얘기와 그의 시골집 공사 진행 상항에 대한 의견도 나눴어요. 우리는 그가 권하는 한 잔의 일본차를 정중히 거절하고 나왔지요. 파리 시내를 걸을 때 차를 너무 마시면 길 위에서 뒷 볼일 보는 게 큰 문제가 되기도 하거던요. 그리고 가까이 있는 갤러리에 들러 오랫동안 못한 일을 처리한 후, 계속해서 바스티유로 향하는 샤론느 길을 걸었어요.


낫시옹 광장(Place de la Nation)에서 샤론느 가(Rue de Charonne), 이 지역은 파리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파리 동쪽에 위치하여 11구에 속하지요.

샤론느 가는 내가 유학 시절에 살았던 기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네요. 오랜만에 찾은 거리는 여러 추억을 떠올려 주었지요. 시장을 보러 다녔던 인적이 드문 오른쪽 길, 왼쪽 휘 페데흐버(Rue Faidherbe)는 동네 도서관을 오가던 길, 아! 퐁피듀센터 도서관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기도 합니다. 학교나 전시장 방문을 갈 때는 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불르바르드 볼떼르(Boulevard Voltaire) 사거리에 있는 샤론느 역으로 가야 합니다. 방금 우리가 지난 온 길입니다.


그 오래전 내가 살았던 창문이 많은 기숙사는 묵직하게 변함없이 세월을 견디고, 높은 벽돌담 사이사이로 촘촘히 난 흰 창틀들이 길 쪽으로 유난히 돌출되어 유쾌하기 조차 합니다. 몇몇 좁은 방들의 유리창에서 이른 저녁 시간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지금은 내가 아닌, 그 시절의 나처럼, 누군가의 고독한 숨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더군요. 기숙사 앞을 지나면서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알랑에게 말했지요. ' 당신, 기억하냐고, 그때 당신이 저기에 서서 나를 기다렸었는데...!'라고.

여자 기숙사인 그곳 정문 앞에는 길 가는 사람들 외에도 어느 여성을 기다리는 남성들 모습이 수시로 보였었지요. 지금은 우연인지 조용합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아스팔트 길 위에서 잎이 지고 휑한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지그재그로 서까래를 이은 듯이, 가로수들은 그때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습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담겨있는 풍경은 푸르른 잎사귀가 살랑살랑 그늘을 만들어 언제나 이 길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따뜻한 계절의 한낮인 듯하지요. 인도 위에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려 놓은 플라타너스 그림자가 어찌나 자연스러운 데생인지, 나는 거기서 작업에 착상을 구하기도 했지요. 그때도 나는 자주 땅을 보고 걸었어요. 이 길은 운치가 있었고, 그래서 이 길로 걸어가는 걸 좋아했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사계절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 왜 기억은 이렇게 짤막하고 단편적이기만 할까요?

지금은 그때보다 나무 둥치는 더 굵어지고 가지들도 많이 자랐네요. 파리는 변화가 참 느립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정겹습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기억 속의 문구점도 눈에 들어옵니다. 겉에서 보면 출입문이 좁고 아주 작은 진열장이라 쉬이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안쪽으로 깊숙이 이어져 있어 폭은 작으나 꽤 넓은 가게지요. 지금도 그곳에는 불이 켜져 있었어요.

그때는 그곳을 들어갈 때 참 주저했던 기억도 납니다. 항상 문이 잘 닫혀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슬쩍 둘러보고 나오기는 참 어색한 분위기에, 내 학생 신분으로는 꽤 비싼 문구점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내가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표지가 단단한 작은 수첩이 있습니다. 양질에 품위가 있고 검정과 녹색의 이색적인 디자인이 고급스러워, 그때 내게는 참으로 이국적이게 보여서 샀는데, 그 이후 아끼느라 몇 장만 넘긴 채 여전히 다 메우지 못하고 있지요. 바로 그 문방구가 지금은 작은 서점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책들 속에 고급 문구용품이 끼어 있었어요.


추억도 뒤로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샤론느 가를 걸어서 바스티유 광장으로 갑니다. 샤론느 길은 참 길어요. 11구 시작점에서 거의 끝 지점까지 이어진답니다. 바스티유 광장 쪽으로 가는 이 샤론느 길에는 여러 전통적인 장인들의 공방과 작업실이 많은 곳이어서 아기자기한 수제 용품이나 현대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적인 것들을 보는 솔솔 한 재미도, 볼 것도 많았어요. 그리고 상업화랑들도 군데군데 있었지요. 나는 공부에 지칠 때면 느릿하게 이 길을 한 바퀴 걸으면서 상점들을 기웃거리다가 돌아오곤 했지요. 그것도 자주 하기에는 시간이 참 부족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변했네요. 잘 변하지 않는 파리라도 20년이란 세월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사실, 요즘 이 동네가 한창 젊은 커플들에게 인기 있는 그야말로 뜨는 동네랍니다. 중심지는 호젓이 여행객들에게 내어주고 파리지앵들의 정체성이 온전히 상실되지 않은, 과거에는 중심지에서 다소 벗어났다고 여겼던, 이 동네로 스멀스멀 하나 둘 들어와서 지금은 마치 속물스러운 파리지앵들의 동네가 되었답니다. 그 옛날에는 유행이나 경향에 잘 타협하지 않고 강한 집념과 아집으로 묵묵히 한 방향으로 걸어가던 사람들의 터전, 그때의 아름답고 정감 있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 자리에 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 옷가게들이 쏙쏙 들어와, 소비문화로 활기차며, 신흥 파리지앵들의 snob 스노버한 근성이 잘 드러나는 모습은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행복한 그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온통 시절 변화에는 어쩔 도리가 없네요. 그때 그 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어느덧,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에 거의 도착했어요. 걸었더니 어느새 허기가 느껴집니다. 에너지 보충으로 딸기 잼을 바른 크랩(Crêpe)과 음료수를 사서 걸으면서 알랑과 한 닢씩 돌려가며 나눠 먹었어요.

허기를 때우고 고개를 들어보니 바스티유 광장 중앙에 있는 7월의 기둥과 그 꼭대기 자유의 수호신 황금 날개가 어렴풋이 윤곽만 보이네요. 이 탑은 1830년 7월 혁명의 기념 조형물이며, 그때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역사상 기념비적인 장소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당시 여기에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는데, 17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감옥이 파괴되었지요. 역사적 예비 지식이 없다면, 지금 보이는 도심 번화가의 이 모습에서 감옥을 찾기에는, 전혀, 예상 밖의 분위기지요.


우리는 바스티유 광장에 있는 오페라 극장 앞에서 무슨 공연이 열리는지 포스트도 잠시 살펴보고, 생폴(Saint-Paul)로 향했었요. 생폴 성당(Eglise Saint-Paul) 앞에 멈춰, 우리는 고개를 높이 들어 이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잠시 음미하기도 했어요. 세월의 때가 끼어 새까매진 바로크 건축물은 어둠에 더 짙고 검게, 묵묵하기 까지 하더군요. 내친김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발걸음을 낮춰 명상하듯 한 바퀴 돌았어요. 내부도 바깥 못지않게 어두워서 세세한 것은 잘 보이지가 않았지요. 오직 누군가의 소망을 싣고 희미하게 타오르는 작은 양초 불들만 눈에 소롯이 담고 나왔어요.


HBH 백화점을 지나서 러나흐(Renard) 가에 우리가 좋아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Ceysson-Bénetière에서 프랑스 현존 작가들의 60, 70년대 "Supports-surfaces"전을 보고, 조금 더 걸어 퐁피듀 센터(Le centre Pompidou)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전시장 앞에서 얼쩡대며 전시장 내부를 살펴보았어요. 늦은 시각이라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볼까 말까 하고 미리 탐색을 했었지요.

퐁피듀 센터 건물 남쪽에는 장 팅게르(Jean Tinguely)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작품들이 있는 스트라빈스키 분수대(Stravinsky Fountain) 광장이 있어요. 낮이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지금은 모두가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벌써 잠이 들었는지 물도 뿜지 않고 덩그러니 광장만 남았어요. 빗물에 젖어 더 짙게 드리워진 광장 너머에 어둠과 물안개에 살포시 감싸인 옛 성당은 까만 망토를 씌운 듯이 보였어요. 생 메리(Saint Merri) 성당의 새김 돌은 어둠의 그림자에 한없이 떠밀려 과거 속으로, 이 한적한 공기 안에서 신비로움과 더불어 경이로움을 발했어요. 그 곁에서 환하게 불 밝힌 현대 건축물 퐁피듀 센터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 기이한 공간에서 내가 마치 외계에 온 듯한 느낌이었지요. 아주 독특하고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드디어 레알(Les Halles)까지 왔습니다. 레알은 집으로 돌아가는 첫 경로를 밟는 곳입니다. 여기서 RER B선을 타야 하거던요. 참 많이 걸었죠? 파리는 겨울도 걷기에 좋습니다. 자주 비가 내리지만 칼바람의 추위는 아니거던요. 파리지앵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산 없이 걷는 걸 좋아합니다. 우산보다는 차라리 모자 달린 방수 외투를 즐겨 입지요. 걷기에는 더없이 자유롭거던요.

오늘 저녁도 부슬비가 내렸고, 어둠이 내려앉은 파리의 촉촉한 거리는 상점과 가로등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반사되어 바닥에 깔린 빠베(Pavé, 바닥에 까는 정사각형 돌 : 옛날 말과 수레가 다니는 길에 깔았음. 현재도 도심의 도로나 광장 바닥에서 많이 볼 수 있음)마저도 원석보다 보석같이 빛나는 거예요.

파리는 겨울밤도 아름답구나 고 생각했지요.

비에 젖은 도시는 어둠의 정적 속에서 가볍게 번들거리고 그 속에서 낮게 자유로이 흔들리는 침묵, 사뿐히 그러나 분주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이 자유롭고도 동적인 가벼움! 이 쓸쓸한 매혹의 도시! 이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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