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만나다
토요일 저녁, A와 나는 적색 포도주 한 병을 들고 파리 19구에 사는 V와 C의 집으로 향했다.
V가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루 사이 뚝 떨어진 저녁 기온에 우리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두꺼운 겨울 외출복을 끄내 입었고, 나는 자주 신지 않는 굽 달린 앵글 부추에 향수까지 뿌렸다.
아주 오랜만에 토요일 저녁 외출이라 좀 더 멋지게 차려입고 싶었다.
A가 옆에서 "너무 섹시하지는 않도록!"라며 짧게 말했을 때,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농담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레짐작 섣부른 추측에 소홀함 없이 알았다는 시늉으로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V는 내 남편 A의 옛날 제자다.
C는 V의 과거 동거녀다.
V와 C는 동성 커플이다.
V와 C는 한 건물 아래 산다.
V는 C가 사는 아파트 옆 C 소유의 작은 스튜디오에 세 들어 산다고 했다.
V를 다시 만난 것은 한 달 전, 남편 A와 내가 2인 작품 전시회를 가진 파리의 갤러리에서였다. A가 우선 그의 제자였던 V의 메일로 전시 초대장을 보냈고, V 역시 전시 오픈날에 참석하겠다는 답을 주었다
전시 오픈 준비가 한창일 때, 레옹 프호 가(rue Léon Frot) 쪽 잠가둔 문을 잡아당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을 마주친 젊고 세련된 여성이 물결치는 긴 파마머리 사이에서 밝게 미소를 던지며 열어 달라는 시늉으로 친근한 제스처를 취한다. 마침 안경을 쓰지 않고 멀치감치 떨어져 있던 나는 지나가던 사교성이 풍부하고 호기심 많은 손님으로 착각하고 바쁜 와중이라 약간 귀찮기도 하여, 돌아서 샤혼느 가(rue de Charonne) 쪽에 난 문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손님은 내가 그녀의 동그란 큰 눈에 풍덩 빠지도록 더 크게 치켜뜨고서, 이마에 난 주름은 밭고랑 같이 더욱 깊게 골을 지으며 아주 반가이 "안녕 S, 나 V야"라고 말한다. 그제야 나는 V가 올 것이다고 했던 A의 말이 생각나는 동시에 그녀임을 알아채고 "아! 너, V구나"하고 예상 밖 그녀의 성숙된 모습에서 놀람과 반가움에 우리는 얼싸 끌어안고 무려 4번의 볼인사를 나누었다. "참,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몰라보겠어" 라며 숨을 몰아쉬며 그동안의 소식 전하기에 부산을 떨었다.
V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 그녀의 첫 전시회가 있을 때였다. 나는 남편 A를 따라 그녀의 전시회에 갔었고, A는 V를 제자라고 소개했었다. 그때 내게 비친 그녀의 첫인상은 생기 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교적인 성격에, 그녀에게 가득 실린 자신감은, 희망찬 장밋빛 낭만적인 예술가의 삶과 세상이 마치 잘 포장된 아스발트 길이라 여기는, 환상 속에 사는 약간 철부지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8년 후 지금의 V는 처음 봤을 때 그 활동력과 사교적인 모습은 여전하지만 얼굴에 생긴 주름은 나이와 시절을 대신하였고 그녀가 쏟아놓은 그동안의 삶은 인생살이 녹녹지만은 않다는 것과 그러나 거친 세월 속에서도 부드럽고 풍부하게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보다 더 세련되게 그녀를 성숙한 여인으로 바꿔 놓았다. 그렇게 우리의 해후상봉이 시작되었다.
문구점에 갔던 A가 돌아오고 두 사람의 해후가 다시 시작되고, 이미 풀어진 이야기는 점점 더 길게 꼬리가 자라나 그렇게 V는 오픈식이 끝나도록 우리와 함께 자리를 지켰다.
그런 뒤 며칠 지나 전시가 끝나기를 이틀 남겨놓은 느지막한 오후에 V는 C를 데리고 다시 갤러리로 왔다.
V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V가 처음으로 직접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 것은 전시 오픈날이었다. 지금은 과거가 되었지만, 한때 C와 함께 살았다는 것과 그리고 현재의 상황까지.
V는 우리에게 C를 소개하고 가방에서 들고 온 수제 캔 맥주 세 개를 차례대로 꺼내 놓는다. 탁자 위에 놓인 서로 다른 종류의 맥주는 V가 좋아하는 것으로써 우리와 함께 재미나게 시음하고 싶어 사 왔다고 한다. 하나의 캔이 열릴 때마다 각자가 느끼는 맛에 대한 논평을 안주 삼아,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듯 우리의 대화도 술술 흘렀다.
C는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촬영, 연출까지 다하는 영상작가다. V는 현재 그림은 그만두고, 현장에서 실내 벽 디자인과 장식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기타 연주와 노래를 부른다고 자신의 노래가 담긴 영상을 우리에게 보내주겠다 한다.
우리는 C가 오래전에 촬영한 거리의 SDF(고정된 집 없이 거리에서 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었지만, 왠지 이제부터 그들을 만나면 그냥 예사로이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맥주에서 포도주로 잔이 바뀌고, 빈 잔 바닥에 붙은 거품이 사라질 때 즈음, V가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