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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앵두 Sep 12. 2017

크루즈 승무원 일기

9월 11일

승객들과 하는 긴급대피훈련 하는 날이다. 신문이나 각종 자료의 번역을 꼭 피난훈련 이라고 하던데, 피난 훈련보다는 긴급대피훈련이 좋지 않나? ㅠ 9시 반부터 시작된 이 훈련은 크루들만 하는 경우도 있고, 승객들과 다 같이 하는 경우가 있다. 크루들은 1주일 단위로 하고, 승객들은 한달에 한 번 정도 한다. 내가 맡은 비상시 업무는 승객들과는 상관이 없는 업무라 승객들과 하거나 안하거나 다를 바가 없지만, 마스터스테이션(master station, 집합장소)의 업무를 가진 크루들은 아마 많이 바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크루 드릴(drill, 이 훈련을 일컫는다) 때보다 더 더디게 진행되는 느낌이다. 선체의 모든 방화문도 닫고, 제대로 작동이 안되거나 하는 것들은 보고 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진행 순서에 따라 나중에는 크루 대피 장소에도 가고, 대기 하고 있다 보면, 훈련을 마쳤다는 방송이 나온다. 시계를 보니 10시 50분. 한시간도 넘게 드릴을 했구나. 날씨가 더워서 걱정했는데,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서 덥지 않았다. 매일 오늘만 같아라~~~

어제 하다가 말았던 피레우스 승하선자 서류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나니 벌써 쉬는 시간이다. 뭔가 정신 없는 느낌이었지만 시간이 빨리 가고 적당히 바쁘니 괜찮다. 모든 건 under control. 하하. 오늘 쉬는 시간에는 어제 인사이드아웃에 이어 #주토피아 를 보았다. 낮잠도 자지 않고 귀여운 토끼 경찰의 매력에 빠져 단숨에 보았다. 딱 내 취향에 맞는 ㅎㅎ 커뮤니케이션 오피서 마리오 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정말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있던데 다음에 기회 봐서 다 다운 받아야겠다.

항로 설명회가 있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어느 항로를 거쳐 항해하고 있는데, 앞으로 갈 기항지 설명과 기타 안내할 사항을 전달한다. 브로드웨이라 불리는 극장 규모가 크지 않아 두 번에 나눠서 진행한다. 두번째 설명회에는 일본인 이외의 국적자들을 위한 통시통역이 제공되기 때문에 두번째 설명회에 참석했다. 94회 때는 동시통역기를 대여받아서 이용해야 했고,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아서 그 존재도 몰랐으며, 보통은 한국어 자막만 보고, 그림만 보고 해서 너무 지루했다. 1시간을, 어떨 때는 승객들이 너무 많아 크루들은 앉지도 못하고 서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설명회에 참석하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운이 좋게 통시통역 자리 뒤쪽에 서게 되면 간간히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설명회는 멘붕. 그나마 마지막 두 번은 우리 리더 리셉셔니스트가 동시통역기를 빌려다 줘서 편하게 듣긴 했지만…

지난 번 항로 설명회 때에 가오리 상이 (내 미국 비자 신청해주기도 한 고마운 분, 경력과 경험이 많아 무엇이든지 답을 가지고 있는 분) 95회 크루즈 때부터는 어플리케이션으로 통역서비스를 제공한다며 본인 아이폰에 다운 받은 어플리케이션으로 항로 설명회를 듣게 해 주었다. 음질 대박. 콜롬보의 힐튼에서 점심 먹을 때 빠른 인터넷으로 잊지 않고, 이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아놨었는데, 오늘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었다. 맨 뒤에 앉아서 동시통역 어플리케이션을 켜니 대박 ㅎㅎ 음질 좋고, 끊김도 없고. 몇 안되는 한국인들을 위해 열심히 통역하시는 분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들었다.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나에서 완벽하게 이해하는 나로 변신. 내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때문에 관련 설명도 많이 듣고, 앞으로 기항할 4곳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그리스의 크레타섬, 몬테네그로(라는 처음 들어보는 나라. 서류 준비할 때 발견한 건데 일본 대사관이 여기에 있다. 한국 대사관은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없지 않을까? 이 작은 나라에 대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깜놀.) 크로아티아. 피레우스를 빼고 이 세 곳은 처음 가보는 곳이다. 하긴 이번 95회는 94회에 가보았던 같은 나라들에 가지만 도시는 다른 곳에 기항해서 매력적인 회차이다. 나도 따라 두근두근. 어디를 갈지 설렘설렘. ㅎㅎ

어제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사실인데 친구 #teola 가 그리스에 있다. 아테네에. 13일에 떠날 예정이라고 하는데 나는 14일에 기항함. 일정이 바뀌어서 잠시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테올라는 발리에서 2년 같이 일했고, 1년은 같은 부서 부띠끄에서 함께 일했다. 비슷한 시기에 클럽메드를 떠났고, 그 후 바로 크루즈 승무원이 되었다. 1년 정도 후에 내가 크루즈 승무원이 되었고… ㅎㅎ 루마니아 친구. 루마니아 동료들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친구 테올라. 보고 싶구만? ^^

내일 새벽 4시 정도에 수에즈 운하 입구를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지난 번에 5시에 일어나서 보았으니 이번에는 잠을 자련다. 대신 내일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낮에 전방이나 후방에 가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수에즈 운하는 사실 그냥 강 같다. 중간에 일본과 이집트가 협력해서 지은 다리가 하나 있고. 좌우가 사막이던 기억이… 그나저나 수에즈 운하를 다시 오다니. 이럴 줄 몰랐지만, 이렇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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