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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앵두 Oct 01. 2017

크루즈 승무원 일기

9월 30일

선상에서의 구분은 기항지인 날 아닌 날. 로 구분 된다. 요일이나 날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일요일은 쉽게 알 수가 있는데, 이유는 메스에서 아이스크림이 나오기 때문에. 점심 햄버거, 저녁 스테이크가 나오기 때문에 ㅎㅎ 예전 크루즈는 4일짜리 크루즈라 승선날, 둘째, 셋째, 하선날로 구분이 되었다. 그 세계에서는 무한반복 4일만이 존재할 뿐.

그래도 오늘은 9월의 마지막이니 날짜를 한 번 보게 되었다. 벌써 10월. 시간 참 빠르다. 한국의 단풍을 참 좋아하는데(등산은 싫어하는 아이러니) 단풍 구경 간 게 언제 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년에는 꼭 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

굉장히 바쁜 하루였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내일 승하선 인원이 100명이 넘는데 준비하고, 이래 저래 변동사항도 있어 처리하고. 거기에다 다다음 기항지 승하선 자료도 준비 해놓고 하느라. 여기에 더해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컴플레인 문제나 기술적인 캐빈 문제로 처리하고 확인해야 하는 일들. 한가한 것 보다는 바쁜 걸 선호하지만 바쁜데 결정권자가 없어 일이 진척이 되지 않는 상황은 항상 부담스럽고 마주하기가 싫다. 내가 그 결정권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편한 것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있으니까. 어차피 어느 소속으로 일하는 게 이것으로 마지막일 테니까. (나의 바램이자 희망사항ㅋㅋㅋ) 모 결론은 엄청 바쁜 하루였다는 것.

드라이덕 이라고 해서 해양법으로 정해져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일정 기간 동안 승객없이 선체수리 및 유지.보수하는 기간이 있다. 승객들이 있을 때는 일 하는 것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큰 공사나 수리 등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회사에서도 내가 하선 한 후 1주일인가 드라이덕이 있었고, 지금 승선해 있는 오션드림호도 12월에 기간은 잘 모르지만 12월 말에 승객을 받는 크루즈 일정이 다시 시작되는 걸로 봐서 길게 할 예정이라고 생각은 든다. 여튼 11월 말에 이번 크루즈가 끝나고 다음 크루즈는 12월 말에 시작되는데, 한 달 정도 쉬고 다시 승선해야지 마음을 먹었었는데 (오세아니아로 내려가는 크루즈 이므로 발리! 호주! 뉴질랜드!!!) 지금은 몇 달은 좀 푹 쉬고 싶다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내 사랑 발리, 호주, 뉴질을 가는 노선은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어차피 기항지에서 몇시간 쉬는 시간 있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크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또, 작년 8개월, 그리고 올해 8개월 배 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지금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들 더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너무 성급하게 결정 내릴 필요는 없지만, 계획하고 대비하는 건 바쁘지 않겠지. 우선은 구정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 나도 가족들과 보내고 싶다. (물론, 각자 티비 보며, 음식 먹고 하는 게 전부겠지만)

얼마전 민들레에 원고를 하나 보냈다. 끄적 끄적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글로 쓰다가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내 이야기를 좀 보태 보았다. 가끔씩 갑자기 남들이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결혼, 육아, 돈, 학교, 경제력, 노후대비, 투자 모 그런 것들 말이다. 가끔이라는 건 보통 한달에 한 번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을 때와 내 통장 저축액이 생각날 때. 친구들의 결혼과 출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몇 년째 철없이 재미나게 내 생활을 하며 사는데,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들 때. 잊고 있던 내 나이가 너무 많게 느껴질 때. 정도 이다. 민들레에 원고를 보내는 건 두 번 째다. (80호던가. 독자들이 만드는 민들레에 글을 보냈는데 아쉽게도 실리지 못함. 이는 후에 내 개인 블로그에 올렸는데 많은 이웃분들이 답글 달아 주셔서 너무 감사했던 기억이) 이번에도 아마 실리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기회 봐서; 올려보도록 하겠다. 고민을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용기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나만 그런 고민하는 게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ㅎㅎ

내일은 6시 출근. 쉬는 시간은 많은 듯 한데 런던까지 어찌 가는지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 내일 결정하자. 오늘은 어서 자고 ㅎㅎ 바쁜 하루 오늘도 수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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