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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11주기 추모 출연작 베스트 7편

가을의 문턱에서 영화처럼 살다 간 그녀를 기억하며..



가을의 문턱에서 태풍도 지나가고 한층 시원해졌는데요, 벌써 9월이 시작됩니다. 매년 만우절에 홍콩스타 장국영을 추모하듯이, 그와는 5개월 차이로 9월 1일에 자신의 출연작 <국화꽃 향기> 속 주인공처럼 영화같은  삶을 살다가 떠난 故 장진영의 추모 11주기가 다가옵니다.

그녀는 지난 2001년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피판 레이디에 선정될 만큼 개성 넘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진정한 배우로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장진영은 지난 2008년 위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 1년째인 2009년 9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달리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오가면서 배우로서 아우라를 각인시킨 장진영의 출연작 베스트 7편을 그녀가 풀어낸 독특한 캐릭터와 함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반칙왕
《체육관 관장 딸 민영 역》


프로레슬러 소재로 하여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반칙왕>에서 상사의 헤드록에서 벗어나려는 은행원 대호(송강호 분)가 체육관 관장 딸 민영(장진영 분)의 조련 아래 타이거마스크를 쓴 레슬러로 반전 변신하는 이야기를 그려낸 김지운 감독의 코미디 영화입니다.

IMF 이후 경제성장이 하락했던 시기에 상사로부터 헤드록을 당하며 현실에 순응하며 무기력했다고 깨달은 대호가 가슴속의 열정을 발견하고 낮엔 은행원, 밤엔 레슬러로 살아가게 합니다.

영화 <자귀모>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한 장진영이 첫 주연을 꿰찬 작품으로, 장진영은 대호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괄괄한 성격으로 나오는데요, 장진영이 본래 가진 쿨하고 호탕한 성격과 유사합니다. 또한 대호를 걱정해주고 그에게 삶에 대한 열정을 살리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냅니다.

   




2. 오버 더 레인보우
 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 연희 역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제 얘기인 거 같아 더욱 몰입해봤던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부분 기억상실증을 가진 기상캐스터 진수가 8년간 사랑했던 여자 친구 연희를 찾아 나서는 멜로 영화입니다.

집에 돌아온 강아지 뿌뿌의 목걸이 인식표와 라이터를 돌려준다는 부재중 음성메시지에 따라 영화 속에서 하나둘씩 제시되는 사진이란 단서를 통해 진수가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조각을 맞춰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장진영의 캐릭터가 돋보였던 이후 작품들과 달리, 진수가 '94 햇살의 흔적'이라 쓰인 사진을 들고 다니며 주변 친구들을 탐문하는데, 진수가 잃어버린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아련하고도 미스터리 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영화 <국화꽃 향기>와 함께 숏 커트를 한 풋풋한 대학생 새내기로 변신해서 활달하고 보이시한 음성에 선머슴 같은 중성적인 캐릭터를 소화합니다. 영화처럼 풋풋했던 이정재와 장진영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 볼만한 작품 같습니다.





3. 싱글즈
《디자이너 나난 역


영화 <싱글즈>는 2003년 장진영 팬클럽 JROSE 주최로 마련된 특별 시사회에서 관람했는데,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미혼모와 낙태 문제를 조명하는 스물아홉 살의 거침없는 솔로 예찬처럼 다가왔습니다.

도시 남녀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권칠인 감독의 영화 <싱글즈>(2003년)는 당시 여성 캐릭터가 부재한 한국영화에서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처럼 불리며 서른 즈음에 이별 통보를 받고 원형 탈모가 생기고 직장에서도 힘들어하는 디자이너 나난 역을 맡았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장진영은 통통 튀면서 가장 밝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통해 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의 오드리 도투를 연상시키는 바람머리 스타일을 유행시켰습니다.  진수의 제스처를 따라 하며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장진영의 댄스는 덤이고요.

이 영화는 2030 세대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출연작 중에 가장 많은 관객수(220만 명)를 기록하며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죠. 엄정화와 두 톱으로 나선 이 작품으로 장진영은 두 번째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4. 국화꽃 향기
《희재 역


영화 <국화꽃 향기>는 김하인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머리에서 국화꽃 향기가 나는 연상의 선배를 사랑한 남자가 결혼에 이르고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향해 애달픈 사랑을 이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밀레니엄 청춘 세대의 순수하고 소박한 사랑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불치병에 걸린 희재 역을 맡은 장진영은 실제로도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영화 같은 인생과 데자뷔처럼 다가와 팬들에게 더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 노래를 듣고 공감하던 아날로그 감성으로 지난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는 이 영화에서 장진영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 서인하(박해일 분)와 이별 후 재회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갔죠.

영화 초반, <오버 더 레인보우>처럼 선머슴 같은 보이시한 매력으로 새내기 인하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투병 후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슬픔을 간직한 캐릭터로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병마와 싸우고 태어날 아기에게 남겨줄 한지 그림책을 만듭니다.





5. 소름
《선영 역


영화 <소름>은 지난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동진과 함께하는 다시 보기' 프로그램에서 관람했는데, 재개발로 철거가 결정된 복도식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는 가정 폭력을 소재로 한 호러 미스터리 영화입니다.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IMF 이후 부동산 개발 광풍을 몰고 온 아파트의 묵시록처럼 다가오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살인을 죽이거나 배신당하거나 버림받는 기구한 인간사의 비극을 목도하게 됩니다.





장진영이 맡은 선영 역은 남편의 모진 학대를 견뎌내는 아내로,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쌓인 엄마로 누군가에게 기대고픈 모습을 보이다가도 필요에 따라 남자를 이용하는 교활한 악녀까지 한 작품에서 다층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장진영은 "영화의 내용도 처절했지만, 배우에게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디렉션도 정말 처절했다"라며 "극 중 클라이맥스인 선영이 연못가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서는 끊지 않고 롱테이크로 오래 가져가서 어느 순간 감정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가 한편으로 근육이 이완되는 것 같아 잊지 못한다"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6. 청연
《비행사 박경원 역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청연>은 장진영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가장 많은 안긴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청연>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팩션 영화인 데다가 윤종찬 감독과 두 번째 만남으로 화제가 됐지만, 실제 인물 박경원의 친일 행각 논란에 휘말리면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한 채 개봉관에서 내려지는 저주받은 걸작이 됐습니다.





비행사가 되고픈 일제 강점기 여자의 꿈과 현실의 대립을 감정의 과잉 없이 잘 그려낸 이 작품에서 <싱글즈>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김주혁과 재회했는데, 원톱으로 했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처연함과 보이시한 박경원의 면모를 소화하며 열연했습니다.

특히, 요인 암살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장면은 영화 <소름>에서 남편에게 학대받았는 장면을 복기하게 만들며 심리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장진영은 영화 <청연>에 대해 "개봉 때 그런 일이 생겨 화병이 났다. 이렇게 끝날 순 없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 상처가 잘 치유되지 않았고 친구들도 안 만나고 외부 접촉을 끊고 집에 있었다"라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7.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룸살롱 종업원 연아 역


영화로는 유작이 돼버린 김해곤의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장진영은 양다리 지질한 남자에게 순정을 다 바치는 룸살롱 아가씨 연아로 변신해 당시 개최된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애인 있는 남자에게 장난처럼 연애를 걸고 점차 사랑으로 변하면서 두 남녀 사이의 티격태격 육탄전과 욕설 등 실제 같은 연애담을 경쾌하게 전개합니다.

하지만 두 남녀의 이별을 예고하고 가슴 아픈 참회의 눈물까지 끌어내며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클리셰인 신파로 다소 무겁게 결말을 맺습니다.

영화 속에서 장진영은 백수남 영운(김승우 분)을 위기에서 구하는 터프함과 한 남자에게 순정적인 모습 외에도 영운의 신혼집을 찾아가 집착이 강한 '팜므파탈'의 모습까지 다양한 면모를 선보였습니다.


 

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연애의 가벼움을 못 견디며 자신의 전부였던 남자가 떠난 후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듯 소주병을 손에 쥔 채 지쳐 쓰러져 있던 어느 날 일방적인 학대와 폭행을 당하는 연아를 지켜보며 가슴 아팠습니다. <소름><청연>을 잇는 장진영의 3부작으로 불릴 만합니다.





유쾌한 영화 <싱글즈>를 제외하곤 여배우가 소화하기엔 어느 하나 쉬운 작품이 없었던 캐릭터를 연기하고 견뎌내면서 병마와 싸웠을 장진영은 한국 영화사에서 배우로서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9월이 되면 찾아오는 추모 열기에 출연작을 다시 관람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네 번째로 <오버 더 레인보우> 보러 갑니다! /힐링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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