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현진이 전하는 삶의 페이소스 미학

최근작 네 편을 중심으로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

올해 불혹의 나이에 이른 배우 서현진은 SM엔터의 아이돌그룹 밀크(MILK) 출신은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해 <식샤를 합시다 2><또! 오해영><낭만닥터 김사부>를 통해 안방극장에서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만하고 왠지 응원해 주고픈 캐릭터를 주로 맡아 왔다.
드라마 <뷰티인사이드>를 기점으로 최근작 속 캐릭터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어느덧 중년의 연기파 배우로서 자신만의 연기 스펙트럼을 쌓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늘할 만큼 단단한 얼굴과 무너질 듯 흔들리는 눈빛 사이에 ‘버티며 살아온 사람’의 페이소스가 그의 캐릭터에서 한 겹씩 드러난다.

멜로와 장르를 오가지만 결국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홀로 시간을 오롯이 견뎌오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타인과 관계를 맺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 뒤늦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정조로 연결된다.
최근작 4편에서 서현진이 소화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시청자들이 교감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전하는 서현진의 미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사랑 앞에서 늦게 성장하는 사람들 – <러브 미>의 서준경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러브 미>에서 배우 서현진이 맡은 서준경 역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산부인과 전문의지만, 스스로 돌보는 데 서툴러 깊은 외로움을 방치해 온 인물이다.

얼음공주라 불릴 만큼 자신의 영역에서 겉으로는 차분하고 유능함을 나타내지만, 속으로는 ‘나만 빼고 다들 제자리 잡은 것 같은’ 뒤늦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준경의 페이소스는 ‘프로페셔널한 겉껍데기’와 ‘사적인 불안’ 사이의 간극에서 생겨난 듯 보였다. 환자의 임신과 출산을 돕는 자리에서 누구보다 삶을 응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관계와 감정 소통엔 유난히 엄격한 모습을 보이며 서현진 특유의 '단단히 굳어 있는 서늘한 표정’을 극대화했다.
이 캐릭터는 <너는 나의 봄>의 강다정처럼 타인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채지만, 자신의 상처엔 둔감한 인물의 또 다른 변주처럼 다가오며, 극 중 서현진의 연기는 '슬프면서도 찬란한 우울'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2. 상실을 안고 계약 결혼을 택한 여자 – <트렁크>의 노인지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에서 노인지 역을 맡은 배우 서현진은 ‘기간제 부부’라는 비밀 결혼 조건 아래, 다섯 번째 결혼 상대 한정원과 이상한 동거를 시작하는 인물이다.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는 미스터리 구조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상실을 안고도 끝내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소화해 냈다.
서현진은 작품의 제작발표회에서 극 중 노인지가 “용기가 없고 겁이 많지만 이타심이 강한 인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착장과 대비되는 무심한 듯 서늘한 표정, 차갑게 보이는 얼굴에 미세하게 스미는 노인지의 감정적 동요는 사랑을 믿지 못하면서도 가족이라는 제도 속에 고립된 캐릭터의 역설 자체를 시각화한다.
<트렁크>에서 전하는 삶의 페이소스란,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다시 한번 깊은 물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에 깃든 비애에서 비롯된다. 그 장면들을 서현진은 말이 아닌 미간의 미세한 떨림이나 심호흡 고르기로 채워 넣는다.


3. 독해진 성공 신화의 균열 – <왜 오수재인가>의 오수재

SBS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에서 오수재로 변신한 서현진은 굴지의 TK 로펌 최연소 파트너이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릎 꿇게 만드는 승부욕과 독선을 장착한 ‘원톱 에이스’다.

그러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이 캐릭터의 핵심 정서는 후회를 삼키고 독해진 사람의 슬픔으로 수렴하는 듯 보였다.
더욱이 극 중 오수재의 페이소스는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끝까지 강해져야만 했던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서현진은 재판장과 로스쿨에서는 칼 같은 딕션과 차가운 눈빛을 장착해 ‘괴팍한 교수’로 혼신의 연기를 쏟아냈다.

홀로이 남은 시퀀스에선 어깨를 살짝 기울이고 목소리의 톤을 줄이며, 그가 혼자 버텨낸 대가로 남겨진 공허를 조명한다.
이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로 봐왔던 서현진의 모습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실은 가장 서현진다운 페이소스를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랑보다 생존이 우선순위기 되었던 여자’가 뒤늦게 타인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발생하는 어색함, 서툴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4. 상처를 감각하는 사람 – <너는 나의 봄>의 강다정

tvN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에서 강다정 역을 맡은 서현진은 감정이 둔감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세밀한 감수성을 가진 호텔 콘시어지로 변신했다.

서현진은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고 과거의 상처를 품은 인물을 연기한다. 자신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캐릭터로 설정되며,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보편적인 우울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강다정은 그의 전작 <또! 오해영>의 오해영, <식샤를 합시다>의 백수지 등 서현진이 변신해 왔던 캐릭터들의 정서를 미세하게 이어받은 듯하다.
극 중 채준의 죽음 이후 화장실에서의 오열 신처럼, 감정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부풀렸다가 특정 지점에서 터뜨리는 방식은, 서현진 만의 감정 완급 조절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그의 페이소스는 “지금은 좀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웃고 있지만, 그 말 자체가 무거운 현실을 여전히 버텨내고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네 가지 캐릭터가 겹쳐 만드는 ‘서현진의 페이소스’

네 편의 드라마 속 인물들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이야기의 장르나 주인공의 직업보다 혼자 견디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 그 후 뒤늦게 비로소 사랑을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 공통된 정조다.

서현진의 페이소스는 바로 이 ‘늦은 마음’, ‘뒤늦은 사랑’에서 나오늘 것 같았다. 후회보단 당당함으로 그의 모습에 환한 미소가 가득해질 수 있길 바래본다.

/소셜큐레이터 시크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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