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 아이만 낳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난 언제부터인가 속상하고 힘든 일에 많이 둔감해지고 무감각해졌다. 얼핏 들으면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주 솔직히 얘기하자면 회피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속상하거나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있다면 쿨한 척 하지만 회피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상처를 대하는 법일지도 모른다.
세은이를 키우며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야 한다'는 걱정인지 염려인지 진심 어린 말인지 조차 헷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들으면서 살았다. 그 말은 여러 번 듣다 보니까 -이 세상에 너의 자식을 지켜 줄 길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여 나를 더 긴장의 상태로 보내려는 말로 들렸다.
순리데로 살다 죽을 권리가 맘 편히 아파서도 안 되는 운명이라는 말을 돌려서 쉴 새 없이 하곤 했다.
게다가 5살 어린 동생을 향해서는 '제대로 커야 한다' '너의 어깨가 무겁다'는 등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에게 말을 쏟아냈다. 가끔 둘째가 속 깊은 행동을 했다고 여겨지면 그 자체를 칭찬하거나 아이의 성향이나 기질을 헤아리기보다는 무조건, 언니 때문에 철이 일찍 들었다고 단정 지었다.
세은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1학년에는 토요일 수업이 있었다. 4교시 끝나고 언니랑 같이 학교에서 산책처럼 걸어오기 위해서 4살의 둘째를 데리고 교문에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같은 반 엄마가 내게 와서 물었다.
"동생은 괜찮은 아이인 가요?"
조잘조잘 나를 향해 뭐라고 얘기하는 둘째를 보며 다가와서 이야기했다.
나는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 말을 꺼낸 그 엄마가 민망하게 끔
"아이 무슨 그런 말을요? 저는 뭐 아픈 아이만 낳는 사람인가요 하하하?"
분명히 그때는 상대가 민망할 정도로 태연했고 오히려 내가 웃으면서 상대를 머쓱하게 했다며 속으로 통쾌했지만 나의 감정은 집에 와서 와르르 무너졌다.
답답하고 억울해서 통곡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을 한다는 건 어쩌면 아직도 그 사람의 무례함에 화가 풀리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타인의 모습과 상처와 아픔을 섣불리 판단하고 성급하게 선입견을 만들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의 많은 힘든 사람들이 위로와 공감을 받고 치유가 되고 용기를 얻지만 상대방 앞에서 우위에 선 채 동정을 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내 아이가 아무리 힘들게 하더라도 난 세은이 엄마를 보면서 힘을 내요'라는 말은 힘들고 괴롭게 하는 어떤 자식보다 나의 딸이 나를 최고로 고단하게 하는 자식임을 말하려는 것을 참 예의 바른 척 하지만 얼마나 무지한 상태에서 뱉어내는 말인가?
난 이미 굳은살이 생겨서 괜찮지만 아직 살이 말랑말랑하여 다치기 쉽고 많이 아파할 수 있는 어린 부모들과 어린 아픈 아이들을 향해 무례한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나의 보잘것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다
상처를 주거나 무례한 사람들이 모두가 나빠서가 아니라 몰라서'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많은 경험을 통과하며 지내면서 난 있는 그대로 정면으로 통과하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 나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의 가슴은 굳은살이 생겨서 단단해지고 무감각해져 갔다. 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믿는다.
마음이 약해지고 위축되었을 거라 믿었다가 오히려 당당하고 냉정한 모습에 당황한 상대를 바라보며 사이다를 날리는 짜릿한 경험이야말로 자존감을 쑥쑥 키울 수 있는 값진 경험이기도 하다.
세상엔 수많은 무례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말에 주눅 들 필요 없다.
웃음으로 가려줄 필요도 없다.
웃음 대신, 사이다를.
그게 훨씬 유쾌하니까.
유쾌하게 정면으로 살아내면 된다.
#중년에세이#발달장애가정#무례한말
#상처와 회복
#자존감#위로와 공감#사이다에세이#브런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