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 ‘부드럽고 따듯한, 다정하고 자상한’
입사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새로운 도메인을 공부하고, 기획서 작성, 업무 계획이 끊임없이 이어지다 보니 제대로 된 줄글을 쓰는 법을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다. 요령을 잊은 것은 둘째 치고,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쉬이고 머리를 비우기 바쁘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열정이 그만 사그라든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 한편에 살아남은 작은 창작욕의 불씨가 내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 글을 쓰자. 그림을 그리자. 뭐든 만들어내자…‘
그러나 내 두 손에 애플펜슬과 아이패드가 쥐어져 있어도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한 달간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우리 팀원들과 회사 브랜드 카페에 방문하여 그린 캐리커쳐가 전부다.
그마저도, 디지털로 옮기는 작업을 몇 주고 미뤄오다가, 이번 금요일에 겨우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모닝 저널을 작성하곤 하는데, 이 마저도 일기나 개인 회고에 가까운 수필이었기에 진지한 글을 나오지 않았다. 글쓰기가 꼭 진지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내 경우 개인 회고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와 그에 대한 감상뿐인지라, 무게감이 없어 창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글쓰기였다.
이전만큼 창작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브런치에서 종종 푸시 알림으로 ’ 글쓰기는 습관입니다 ‘하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머리가 점점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간결한 글을 쓰려고 하고, 또 그런 글을 읽고 싶어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려고, 상상하는 힘을 기르려고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하곤 그 시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아직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하루키의 감각적인 묘사에 마음을 위로받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작품을 현실의 관점에서 요약하고 정리하려 하는 것이다. 아마 업무 상의 글쓰기의 영향이리라.
삶에 피로감을 느낄 때, 내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다.
’ 부드럽고 따듯해.
다정하고 자상해.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자.‘
그러고는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아주 느리게 해 나가는 것이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감각이자 형용사이다.
다정하고 자상하다는 표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속성이다.
이 말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게 아주 필수적인 최소한의 요소들이다.
그 감각을 되뇌면서 현재의 좌절감과 슬픔을 몰아내고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주말 한낮의 햇살이 (뜨겁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따듯하다.
오래된 애착 잠옷이 부드럽고 따듯하게 나를 감싸고 있다.
창밖의 새소리와 아이들 소리가 집 안의 정적을 부드럽게 메꾸고 있고, 방 온도가 적절히 따듯하다.
소리를 내며 뛰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존재만으로 다정하다.
분명 자상한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다.
남자친구를 떠올린다. 처음 서로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로의 단점과 어리숙한 모습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도 그는 다정함과 자상함을 저버린 적이 없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나, 가만히 맞잡은 손의 온기까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의 감각이 다정함과 자상함으로 가득 차게 하는 고마운 사람이다.
친구들을 떠올린다. 숫기도 없고, 잘 꾸미지 않아 밋밋하고, 매 순간 어색한 듯 행동하는 내게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게 다가와준다. 그런 내게 묵묵히 응원하는 우리 가족은 어떤지. 그리고 내게 작은 업무 하나하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시는 우리 회사 팀원들은 또 어떤지.
미숙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세상이 아직 지켜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어느 전지전능한 신일지, 그저 내 머릿속의 환영일지 몰라도.
그 단순한 감각과 사람의 속성들을 내가 아직까지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것은 나의 삶이 그저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가치를 찾아 헤매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으로 느껴진다. 누구도 그 무엇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느끼는 나는 존재한다.
영원히 회피하고만 싶은 현실의 어렵고 복잡한 과제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내 기분과 상황이 어떻든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끊임없이 카카오톡, 메시지,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해야 한다.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완성하기로 한 프로젝트들도 풀어내야 할 문제가 산더미다.
앉아 있는 시간이 늘면서 허리도 아프고 몸의 피로가 나날이 쌓여가고 있으나, 살도 빼고 체력도 증진시키기 위해 운동도 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도 편히 먹지 못한다. 그 와중에 오늘은 두통까지 나를 방해한다.
주말 중에 해야 할 집안일 목록을 쭉 써두고 신나게 해치우려던 참인데 우선순위 상 당장 다른 일부터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는 현실의 모든 것이 풀어야 할 문제가 되어 나를 압박하곤 한다.
실제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것들을 ‘해결’ 해야 할 문제로 여기는 내 태도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을 즐기고, 누군가에게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운동과 할 일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생산적인 일 = 피곤하고 재미없는 일이라는 등식을 깨부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심지어는 나 조차도 생산성 분야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그저, 생산성에 대해 연구하는 것과 실제로 생산적으로 사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종이 한 장 차이인데 그까짓 거 즐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삶은 과제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을 너무 많은 순간 나는 잊어버리고 만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서 압박감으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려면 뭐든 즐기려는 태도를 만들어야 한다.
체력을 증진하는 것도 그런 태도를 만드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내가 식물들에게 매일 생각날 때마다 기꺼이 분무질 하는 것처럼, 내가 기꺼이 노고 하는 대상 그 자체를 덕질해 보자.
생명력 가득한 그 생그러운 연두색 신엽을 만나는 기쁨을 발굴해 보자.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사람들과 친밀해지고 삶이 활력 넘치게 변하는 그 기쁨을, 운동으로 나날이 가벼워지는 기쁨을,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 성취감을 팀원들과 나누는 기쁨을 발굴하자.
감사일기를 쓰는 목적은 아마 삶으로부터 과제만을 받는다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드럽고 따듯한 날씨의 하루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자상한 말과 미소를 건넬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이 모든 것들을 기쁘게 돌려주는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