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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Apr 02. 2022

울면서도 계속 걷기

40살 신입 마케터 일기 (5): 정말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일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간 업무가 4가지 정도의 업무가 혼재되어 있었고, 지난 6개월간은 3가지의 업무를 동시에 해야 했고 이제 2가지 정도의 업무로 정리된 지 2개월, 이제 메인 업무에 1가지 업무를 약간 얹어서 하고 있다. 특히 6개월간 업무를 2가지 정도 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일을 했는데 풀타임 직원 한 명을 채용하고 업무를 넘겨줐고 나서야 일을 줄일 수 있었다.


나의 메인 업무는 CRM인데 특히 해본 적도 없는 데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지금껏 고민하고 있다. 업무도 업무인데 관련된 솔루션을 도입하는 일까지 맡아서 하게 되면서 하루도 울지 않고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퇴근길에 회사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선생님이 잘 들어주셔서 한참 울다가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후로도 상황이 특별히 좋아지지는 않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곳에서 나만 잘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문제없이 잘 일했는데 나와 이 회사는 잘 맞지 않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적성에 맞는 일이란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것이 어쩌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김연아 선수 같은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김연아 선수 같은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 선택이긴 했지만 또 내 선택이 아니기도 했던 회사로의 입사는 계속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에서 이미 충분히 고생을 했다고 생가했는지 더 어렵고 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뭔가  잘해보려 할수록  일이 꼬이기도 했고 자신감 있게 마무리를 했는데 실수가 연속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특히 솔루션 도입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을 해야만 했는데, 이렇게 해도 혼나고 저렇게 해도 혼나고 마치 어두운 산길을 등불 하나 없이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약간 자신감이 없다 보니 더 실수들이 많아지는 느낌이었다. 예전 회사에서 저 친구는 참 괜찮은데 왜 저렇게 말을 하고 일을 놓칠까 아쉽다 싶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것 같다. 정말 자신감도 없고 그러다 보면 실수가 늘어나게 된다. 일머리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배워갈 수밖에 없다. 그 친구들이 지금은 대리가 되고 과자가 되고 멋지게 일을 해내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뿐이다. 물론 내가 나이 40에 다시 신입이 된 상태를 견디는 것은 여러모로 현타가 오지만 그것들은 감수하기로 한다.


특히 센스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생겼다. 자신이 자신 있는 분야에 대해서 결국 언젠가는 큰코다치게 되어 있다는 게 개인적인 인생의 원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는 최근 커뮤니케이션 이슈까지 겹치면서 인생의 매운맛을 경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과 데드라인이라고 생각한다. 커뮤니케이션이 꼬이면 데드라인까지 꼬이기 마련이라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인 것 같다는 경험을 하고 있다. 빠르게 한다고 좋은 커뮤니케이션도 아니고 결국 방식과 타이밍 등 복합적인 고민을 통해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일했던 곳에서는 팀원들과의 유대감도 좋았고 서로 친밀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이번 회사에서는 정말 업무로만 만나다 보니 그 차가움에 사실 적응이 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커뮤니케이션도 더 어렵다. 이제야 아주 조금씩 감이 잡히고 있는데 조만간 정리해보려고 한다. 또 재택을 오래 해서인지 박사 하며 말을 못 하게 된 건지 머릿속이 딱딱해져 버렸다. 예전에는 업무를 전달받으면 머리가 휙휙 돌면서 그림이 쫙 그려졌는데 이제는 업무 지시를 받으면 머리가 굳어버린다. 정말 머릿속에 돌이 하나 들어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 메 뭐 하나 묻기도 어렵고 메일 하나 쓰기도 두렵다.


개인적으로 아직 내가 팀에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전에 옥토넛 바나클 대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한번 언급을 했었다. 조직 내에서 팀원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안정감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팀원들의 창의성과 성과에 영향을 많이 준다.

Psychological safety is being able to show and employ one's self without fear of negative consequences of self-image, status or career ( Kahn 1990)
심리적 안정감은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지거나 커리어나 평가에 부정적인 결과가 생긴다는 두려움 없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안정감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다. 실수에 대해서 조직과 리더가 어떤 대응을 했느냐에 따라서 팀원들이 어떻게 안정감을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가 달라진다. 이런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분위기는 팀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조직의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다. (Baer & Frese, 2003)


하지만 이러한 팀 안정성을 느끼는 조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도 어떻게 일을 할지를 연구하는 편이 더 실질적인 연구인 것을 몸소 경험하고서야 깊이 깨닫는다. (사실 학위논문도 이런 내용이긴 했다) 이래서 경영학 연구자들은 실무경험이 있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 팀 안정성과는 별개로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만 한다. 앞으로도 계속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만두던지 극복해가던지 둘 중 하나의 선택지가 있을 뿐이다. 조직문화담당자님과의 대화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내 생각이 좀 더 정리된 후로 만남을 미루고 있다. 일이 바쁜 스타트업-이라고 쓰고 중소기업이라고 부르자-에서 팀 조직에 나만 적응을 못한 듯 보인다면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일을 하는 것 그래도 소통을 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자기 계발서들을 읽고 논문을 읽은 조직행동을 전공한 박사이지만, 내가 조직에서 적응을 어려워하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경험들이 이런 글들을 쓰고 논문을 읽게 하니 나쁜 일만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은 버티기, 울면서도 계속 걷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가장 큰 일이다.

결국은 버티기, 울면서도 계속 걷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가장 큰 일이다. 여러 번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아서 버티기로 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보려고 한다. 아마 버텨야 할 곳, 떠나야 할 곳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보아도 한 번은 더 버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군대는 가기 싫어도 가고 1년 6개월을 보내야 하는데 나도 한번 1년 6개월은 버텨보자 생각했다. (이제 6개월 남았다)


6개월 후에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예전 고등학교 1학년 때 경험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련회를 갔었다. 산도 타고 줄타기도 하고 그런 곳이 었는데 거의 마지막 날에 오리걸음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없으면 빠지라고 했다. 그렇게 여러 번 교관들이 자신 없으면 빠지라고 이야기해서 나도 결국 한 3번째에 포기하고 뒤에 남았었다. 바로 그때, 그래도 자신들은 저 산을 넘겠다면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가상훈련이었다면 마지막까지 남은 용기를 칭찬하며 상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충격이 지금껏 남아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금방 끝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이 한고비를 넘겨보자고 늘 마지막으로 못 버티겠다 할 때쯤 다시금 맘을 다잡는다. 지난주에도 한 회의를 끝내고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이직을 알아보다 다시 마음을 붙잡고 일을 마무리하고 있다. 많은 도움의 손길로 일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래 버티길 잘했어 생각했다.


물론 아직도 일은 마무리하려면 한참의 여정이 남아있고 머릿속은 겨우 맷돌 돌아가듯 돌아간다. 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올 날들이 있을 것이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일 날들이 또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내 머리도 소형 믹서기 돌아가듯은 돌아가 주길 바라며 오늘도 한숨 한번 크게 쉬고 슬랙과 노션을 열어본다.


오늘도 한숨 한번 크게 쉬고 슬랙과 노션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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