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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Dec 06. 2021

고객 상담의 기쁨과 슬픔 (1)

40살 신입 마케터 일기 (4): 저보고 고객상담을 하라고요??

지금 회사에 들어오면서 처음 작은 연구 용역 계약이 끝난 이후에 제안받은 것은, 고객상담이었다.  Customer Service. 최근에는 Customer experience라는 말로 보다 포괄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나 40살에 박사인데 고객상담을 하라고?'


'나 40살에 박사인데 고객상담을 하라고?'

'내 성격에 고객상담 같은 것 잘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뭐든 일해보고 싶은데 한다고 해야 하나'


내가 사는 곳은 GMT +3,

한국은 GMT +9


미국 시간에 일해 주시는 분은 이미 계셨고 나는 그 사이의 애매한 시간, 한국의 저녁부터 미국의 새벽시간까지를 채워주기 딱 좋은 곳에 살고 있었다. 꽤 규모가 있는 스타트업이지만 CS만 전담으로 하는 인력을 채용하기에는 여유가 없는지 마케팅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CS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 글로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특성상 영어로도 상담을 해야 하는데 영어와 한글 모두를 할 수 있는 CS에이전트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다고 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다소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표정관리를 잘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대표는 내 표정 변화를 읽은 걸까 이것은 일시적인 일이며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일을 구하면서 딱 2가지만 놓고 기도했었다.

      전공과 관련이 있을 것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일 것     


전공과도 관련이 없고 누군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국제개발 쪽에 뜻을 두고 박사학위를 했다. 대학원 면접볼떄 'UNDP에 들어가려고 공부한다'라고 하고 합격했었다. 그 후에도 계속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곳의 일이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초등교육을 걱정한다. 예방주사와 위생교육에 대해 고민한다. 자원의 재분재에 대해 십수 년을 고민했는데, 이런 자본과 기술의 정점에 있는 투자회사라니. 거기다 그곳의 CS 상담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이런 앨리스도 없다.
흰 토끼는 어디에 있나.


Photo by Satyabrata sm on Unsplash



처음에 이 회사에 조인하게 된다면 그래도 나는 오래도록 연구자였으니 아마 리서치 업무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혹은 기획이나 전략팀에서 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CS상담원을 제안받은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내 분야에서 선임연구원이나 교수로 가야 하는 나이와 경력인데, 완전 다른 분야의 CS상담원이라니 뭔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직강 하하는 것 같았다. 이 직업을 결코 무시해서가 아니다. 고객상담은 정말 기업에서 너무 중요한 일이다. 고객이 고객센터를 찾을 때는 대부분 뭔가 잘 안되고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이다. 이 부분을 잘 해소해서 고객 경험을 좋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금융권의 경우 다들 민감하기 때문에 더 어려울 것이다. 내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간의 내 전공과도 너무 다른 일이며 완전 새로 시작해야 하는 분야이다.  왜 하필 지금 나에게 이런 새로운 도전이 갑자기 주어졌을까. 새로운 시작이라니. 박사학위를 마치면 이제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연구나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또 실시간 대응이 너무 중요한 일인데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이메일에 즉각적으로 답장하는 스트레스에 불안장애도 겪었던 나인데, 하루에 일정 시간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즉각 대응을 해야 하다니. 내 정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 나에게 이런 새로운 도전이 갑자기 주어졌을까.


고객관리 이론에 대해서 들어본 것도 같고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도 당연히 고객님들과 통화를 해본 적은 있다. 고객상담실에서 도저히 처리가 안될 경우 그 업무 담당자인 나에게 고객님을 연결해주면 여러 가지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었다. 그 정도. 낯도 많이 가리고 그다지 친절한 성격도 아닌 나에게 고객상담실 분들은 천사처럼 보였다. 늘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주셨고 이상하게 이야기해도 찰떡처럼 알아들어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내가?


고객상담을 내가 주니어 시절에 제안받았다면 하겠다고 했을까? 아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오만했으니 아마 거절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더 성장했달까. 당혹스러운 한편으로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오 신선한 경험이겠다, 결국 고객상담은 경영학의 기초 중의 기초지.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조직행동을 전공한 게 어쩌며 도움이 될까? 고객 경험 전체를 디자인해볼 수 있어도 좋겠다. 해보고 안되면 말지 뭐'


가만히 생각할수록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로 보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 회사는 이메일과 채팅상담만 하고 있었다. 전화상담이면 아마 시작도 못했을 것 같다.


결론은 "해보자"였다.


늘 내 발걸음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향한다.


처음 대학원에 갈 때도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 후의 모든 발걸음은 생소했고 쉽지 않았다. 항상 고민했지만 낯선 땅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을 찾았다. 예상치 못한 삶의 갈림길은 처음에 당혹스럽지만 아주 감사한 일이다. 그래 해보자. 마케팅의 '마'자도 모르면 나는 신입이지. 고객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이제 시작이지. 오히려 아무런 경험이 없는 나에게 CS라는 업무를 권해준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3개월 계약을 하자고 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지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정규직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한다)


마케팅 헤드는 CS 업무를 한다고 하자 매우 기뻐했다. (다행이다) 간단한 교육을 받고 CS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영어로 말은 잘 못해도 쓰는 것은 나쁘지 않아서 영어/한글 모두 cs를 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Hi, how can I help you?"


많이 들어봤지만 말해본 적은 많이 없는 생소한 문장을 써 내려갔다.


내가 CS 상담원이라니.

정말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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