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을 기다리게 될 줄이야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by 서박하

2주에 한 번씩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고 있다. 카메룬에서 3주 만에 짐 챙겨서 들어와 집구하고 한국에 정착하며, 또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며 다시 약을 먹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약을 먹으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들은 항상 약을 줄이는 것을 시도하신다. 그러기를 2-3번 실패하고 나서 나는 이 시간들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처음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 건 이메일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당시 이메일을 받으면 심장이 종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밤이고 낮이고 언제 이메일이 올지 몰라서 잠도 잘 못 자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다 약을 먹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메일에 대한 약간의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어서 가장 기다리는 것이 이메일이 되었다. 일하자는 이메일을 기다리다 보니 핸드폰 알람이 반가워졌다. 링크드인 알람도 반갑다. 이전에는 핸드폰 알람만 울리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숨이 가빠지고 그랬는데 이제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 생겼다. 혹시 일이 들어왔나 하고 말이다.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지금은 가장 기다리는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사실 지난번 회사에서 CRM 마케터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일을 할 때에도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이메일을 읽고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게 할까 고민하여 가장 최적의 시간에 최적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애를 썼었다.


그러다 지금은 이메일을 가장 기다리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박사과정 마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번역일을 할까 하다가 밤낮없이 이메일을 기다리고 빠르게 답해야 한다는 것에 포기했었다. 그러한 삶을 다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나아지지 않는 상처는 없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이메일 답장을 빠르게 하지 못해 숨이 가빠지지도 힘들지도 않다.


약의 힘이라며 힘일 수도 있겠다. 약을 내가 좀 더 빨리 먹었더라면 병원을 좀 더 빨리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많이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병원에 다니고 있고 나아지고 있어서 내 마음이 평안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있다. 사실 깜빡하고 약을 안 먹는 날이 반도 넘는다. 그래도 괜찮을걸 보면 이제 정말 약을 줄여도 되는 시기라 생각한다.


지금도 들어온 이메일에 빠르게 답장을 한다. 영어 이메일이 대부분인데 그래머리가 있어서 정말 좋다. 그래머리가 나 학위 할 때도 있었으면 아마 스트레스가 반은 줄었을 텐데 생각했다. (사실 그때도 있긴 했는데 지금처럼 좋지는 않았다) 오늘 페이팔로 업체에서 정산이 된걸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점점 정산이 될수록 더 안정되겠지. 역시 금융치료랄까. 오늘도 이력서를 돌리고 열심히 홈페이지를 만들고 이메일에 답장을 한다. 알 수 없는 인생이 감사한다.



사진: Unsplash의 Austin Dis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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