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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Jul 24. 2020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Scribentes, ergo sum.

Photo by Kat Stokes on Unsplash


글쓰는 인간 homo scribentes: 호모 스크리벤테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명한 인간)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의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저는 호모 스크리벤테스(Homo Scribentes)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생소하시죠? 당연합니다. 이 단어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라틴어 사전을 검색해보고 만들었는데 혹시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발!)


호모 스크리벤테스(Homo Scribentes)는 매년 다이어리를 몇 권씩이나 쓰고 잘 나오는 펜을 좋아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블로그나 SNS 뭐라고 적어 올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호모 아키비스트(Homo Archivist)라고 기록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뭐랄까 업무적으로든 뭐든 기록하고 저장하는 것에 대한 뉘앙스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일기를 쓰고 시를 쓰고 그냥 끄적거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림일기를 썼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자물쇠가 달려있는 두꺼운 양장 다이어리를 쓰곤 했어요. 그리고 대학교에 다니면서 싸*월드 다이어리에 몇백 개가 넘는 글을 썼어요. 지금은 소위 '오글거린다'라는 말로 좀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적고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고 나누고 싶어 할까요? 그냥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어도 될 텐데 말이지요.


 빈 화면을 바라보며 나의 생각들을 적어 내려 가는 순간,
나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노트와 마주하거나 노트북 화면을 마주하는 순간은 특별합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빈 화면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 내려 가는 순간에는 내가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정말 사랑합니다. 버스를 타고 떠오른 어떤 생각들, 한 문장을 기억했다가 글을 적어 내리고 하나의 글로 만드는 시간이 정말 좋았어요. 좋아하는 보사노바를 틀고 차도 한잔 따르고 맛있는 쿠키도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글과 나는 단둘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물론, 아 이 글을 보고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해주면 좋겠어라던가 잘 쓴 글이라고 칭찬받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나 스스로와 하는 것이지요. 글과 나는 단둘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이런저런 글을 적으며 나는 위로받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또 눈물 흘리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합니다. 온전한 내가 되어 홀로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저에겐 글 쓰는 시간뿐이었던 것 같아요. 사색하는 것도 물론 매우 좋아하지만 대부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키고 또 방해거리가 많거든요.


글이 내 손을 떠나 어딘가에 올라간 후에는 나만의 글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댓글이 달리거나 의견이 붙여지면 더 그렇지요. 누군가와 함께 쓰는 글,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진 글이 되지요. 함께 글을 나누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 됩니다. 저는 싸*월드 다이어리를 정말 사랑했어요. 적당히 나를 아는 소중한 사람들과 글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2004년 처음 쓰기 시작해서 열심히 적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도래한 스마트한 시대에 밀려 모든 것들이 변해버렸어요. 페이스북에도 트위터에도 저는 쓸 수가 없었어요.


2008년 이후 취업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또 사회가 급하게 변해가면서 낭만적인 글들에 대해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글쓰기를 멈추었어요. 다이어리는 스케줄을 관리하는 플래너로 바뀌었어요. 시집 대신 자기 계발서를 읽었어요. 써야 할 글들이 생각나지 않았지요. 뭐라도 쓰려다 보면 '아, 이 시간에 논문을 하나 더 읽어야지' 혹은 '통계를 공부해야지'라며 덮어버리기 일쑤였어요. 그런 시간들이 쌓여가고 저는 몸과 마음이 아프게 되었어요. 오래도록 약을 먹고 삶의 의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어요.


그러던 지난 1월의 추운 어느 날, 진한 핑크색 노트가 생겼어요. 저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뭐든 쓰기 시작했어요. 적고 붙이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제멋대로 시를 짓기 시작했고 소설을  썼어요. 편지도 쓰고 노랫말도 적었어요. 그리고 다시 내 마음이 이야기하는 것들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어요. 모두가 잠든 깊은 겨울. 홀로 앉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노트북을 붙잡고 밤마다 글을 쓰던 시간은 봄이 되면서 점점 늘어갔어요.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아주다가도 집에서 갈치를 굽다가도 또 전철을 타고 일하러 가다가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는 것들이 커다란 기쁨이 되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 어느 순간 모두 맞춰져 한편의 글이 되는 순간은 무엇보다 짜릿합니다.

좌: 진한핑크다이어리 (오른쪽 아래, 없는 솜씨로 다꾸를 시도...)/ 우: 오렌지색 다이어리에 5월에 썼던 내용들


써 내려간 글이 쌓여갈수록 제가 먹는 약의 양도 줄어들고 있어요. 이제 마지막 단계의 약으로 줄었는데 다음번 방문에서는 의사 선생님께서 약을 완전히 끊자고 하실 것 같아요.


 '우울해, 죽고 싶어, 이혼해야겠다'


제가 1월에 핑크 노트에 적었던 글이에요. 지금은 핑크 노트는 다 써서 오렌지색 노트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오렌지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어요.


'나는 꾸준히 성실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지'


그리고 쓰고 싶은 글감들이 잔뜩 써놓았답니다. 물론 그간 치료도 열심히 받았고요. 저는 아이를 위한 예쁜 동화책도 짓고 싶고 쉽고 재미있는 심리학 책도 쓰고 싶고 에세이집이나 소설책도 쓰고 싶어요.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라니 1월의 제가 보면 아마 믿지 못할 것 같아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어떤 대가도 마감도 없이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10여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기쁨이 이제 평생의 기쁨이 되도록 계속 글을 써가려고 해요.


저는 글 쓰는 인간 homo scribente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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