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2년생, 재수해서 02학번이다
이제 몇십 시간 후면 한국 나이로 40세가 된다
1987년 어릴 때 어렴풋이 노태우 대통령 뽑던 시절 우리 집 담벼락에 포스터가 붙어있던 것이 생각나고 5살에 이미 혼자 걸어서 유아원에 다녔고 아침에 나가 유아원에서 점심 먹고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1988년 강원도 고성군 00읍에 살던 나는 88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잠실이 지명인지 몰라서 엄마에게 뜻을 물었고 그렇다면 잠실에 사는 고모는 저거 다 보겠네 생각했다
1990년대 초반 SBS는 TV에 나오지 않고 버스로 40분을 가야 롯데리아에 갈 수 있던 지역에 살던 나는 베니건스 피자헛 광고를 보며 외국방송인가 했다.
1996년 서울로 이사와 세상 그렇게 높은 언덕에 집이 있는 걸 처음 알았고 우리 동네인 봉천동이 달동네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지금은 이름이 변경되었다)
1997년 IMF가 지나던 여름,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지 못해 전전긍긍했고
1998년 HOT 토니오빠를 사모해 온갖 포스터와 잡지를 사모았고 팬픽을 읽었고 펜티엄 컴퓨터에 5.25와 3.5 디스켓을 넣어 사진을 모았었다
1999년 전람회와 패닉을 좋아해서 테이프를 사모았고 만화대여점에서 순정만화를 빌려봤고 할리퀸에 빠졌었다.
2000년 친구들과 싸웠고 절교했고 독서실과 학원을 오갔고 재수를 결심했다.
2001년 강남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했고 퀵실버 가방에 티니위니 티셔츠, 닥터마틴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2002년 집을 떠나 기숙사 학교를 다니게 된 기쁨에 놀 아재 꼈다. 그때는 1학년 때부터 취업 걱정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3, 4학년 때부터 준비해도 다들 취업을 잘했다. 비가 오면 학교 잔디밭을 맨발로 뛰어다녔고 밤새도록 친구들과 삶의 의미에 대해 토론했고 맥주 먹고 잔디밭에 누워 별을 보기도 했다.
2004년 어학연수에 배낭여행 붐에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2005-6년 대학교 3, 4학년을 연애와 공부로 보내고
2007-8년 졸업 후 젊음과 열정을 바쳐 무급으로 혹은 매우 적은 돈을 받고 여기저기서 일했다. 그 당신에 무급인턴은 너무도 흔했고 '고생은 사서도 하지'라는 명제가 당연시 여겨졌다.
2009년 그때까지 그래도 남아있던 낭만과 긍정의 기운을 몰아 대학원에 입학했고 2009년 대학원 1년 차에 아이폰이 처음 나왔고 비트코인을 알았고 친구들과 함께 비웃었고 (지금도 후회, 문과인 나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다 공대생이었는데)
2010-11년 29살, 30살 넘으면 인생 끝나는 줄 알고 결혼하고 싶어서 내 인생 최악의 연애를 했고 대차게 최악의 남자 친구에게 차이고 퉁퉁 부은 눈으로 산속 기도원을 향하던 겨울을 지나 정신없이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과 모여 30살 파티를 했고 그 파티를 했던 사람들과는 그 후로 만날 일이 없었다
2013년 32살, 지금은 아주 풋풋하게 여겨지는 나이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늦은 나이에 짝꿍을 만나
2014년 그 당시로는 꽤나 늦은 나이인 33살에 결혼했고
2016년 또, 지금은 평균이지만 그 당시에는 노산이었던 35살에 아이를 낳았다.
2020년 코로나라는 지금도 꿈이면 좋겠는 일을 만났다.
40살이 되면 만렙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쪼렙이다
엄마는 말한다. '40살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UN에서 일하고 아이는 2명, 남편은 경제학 교수였다. 집은 뉴욕 어디쯤 자신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렸다. 구체적으로 긴 머리에 샤넬 트위드 재킷,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시크하면서도 우아한 (?) 모습을 꿈꿨다. 아, 몸무게 48kg 정도의 늘씬함을 자랑하는 그런 엄마이자 아내,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나의 최선의 범위를 다르게 정의하기로 했다. 예전에 어떤 일을 부탁받으면 잠자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받았다. 즉 하루 20시간 정도를 일한다고 생각하고 일을 받은 것이다. 잠도 안 자고 일을 하며 몸을 망가트리길 여러 번, 이제야 하루에 8시간, 길어야 10시간 정도를 생각하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니?라고 물었을 때 '왜 더 밤새우지 못했지'라고 자책하지 않고 '그래 최선을 다했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은 아마 열정 페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2000년대 초반을 살아내던 시대의 잔해인 듯하다.
어떤 일에든지 나만의 견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뭐든 나는 '중립'이야라고 이야기하던 때를 지나, 또 머리 아프게 사상, 좌우를 생각하기 싫어서 넘어가던 이슈들에 대해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정리하고 고민하기로 했다.
삶의 궤적을 가볍게 하고 싶다. 진심으로 내 짐이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1년 12달 입는 옷이 40여 가지라는 어떤 블로거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좀 더 가볍게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진정한 나그네로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케냐든 어디든 떠날 때 아이의 캐리어 하나, 나의 캐리어 하나 이렇게 2개만 들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식재료 캐리어 하나도 추가를 하긴 해야겠다)
꾸준히 글을 쓰려고 한다. 역시 쓸수록 고칠수록 글이 미세하게나마 좋아진다고 느낀다. 조금씩 삶이 정돈되는 것 같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언젠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라 소망한다.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은 금세 버리려고 노력한다. 이건 병을 오래 앓다 보니 시작된 버릇과도 같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험담은 이제 듣는 것도 힘이 든다. 나도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고 하루 이상 그 독을 품고 있지 않으려 한다. 자책도 그만하려 한다. 이야기를 못해 정말 죽을 것 같을 때만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정제된 언어로 잠깐만 이야기하려 한다. 독은 전해지게 마련이다. 결국 그런 독을 품고 있으면 아픈 건 나다.
40살을 앞두고 기쁨이든 후회든 조금은 감회가 새로울 82년생 친구들에게 수고했다고 40년간 정말 멋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에게 또 이야기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