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결핍의 도시를 벗어나기
소비 단식일기 (22): 나이로비로 오는 길
도시와 공간이 주는 압박과 유혹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제주도에서는 여유롭게 걷고 싶고 서울에서는 빨리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이소에 가게 되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마구 구매하게 되고 면세점에서는 괜히 안 필요한 립스틱이라도 하나 사게 된다. 물론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한국을 떠나면서 마지막 쇼핑 혼을 불살라 우체국 박스로 12개의 박스를 컨테이너로 보내고 왔는데 막상 나이로비에 도착하니 그 모든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로비에 오면 채식이 자연스러워지고 현지에서의 쇼핑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진다. 넓은 마당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보여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것 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너무도 많은 필요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날아드는 광고 문자에 어쩌다 클릭이라도 하면 홀연히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또 한 가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절묘한 (?) 위치에 있어서 최근에는 기후적인 영향도 크게 받고 있다는 점이 크다. 미세먼지가 많고 코로나로 인해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환경이 더 쇼핑에 집착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집은 케냐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사는 집 중에서 좋은 집에 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넓은 마당이 있고 맑은 하늘과 공기가 있다는 것이 마음을 한결 여유롭게 한다. 어차피 나가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잔디를 밟으며 산책할 수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이미 쇼핑앱을 열지 않을 이유가 된다. 이곳에 도착하면서 바로 쿠팡 와우 회원과 네이버 멤버십 결제를 해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코로나가 찾아준 평화이다. 2년 전 이곳에 와서는 안전과 인프라의 이유로 한국보다 갈 곳이 없다고 불평했었는데 어차피 한국에서도 갈 곳이 없게 되자 이 곳의 환경이 좋아진 것이다. 아 간사한 인간이여.
2년 전 처음 나이로비에 왔을 때는 뭔가 채울 수 없는 마음을 쇼핑으로 채웠다. 이곳에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쇼핑을 해서 한국에 있는 친정집으로 보냈고 엄마는 그것들을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는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물건들은 쓰지도 않은 채 2년이나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번에 나이로비로 돌아오면서 가장 큰 변화는 먹을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지 않은 것이다. 12박스는 전부 약, 정수기 필터, 아이와 우리의 책이다.
원래는 한국 배추, 무, 파, 상추 씨를 가져와서 마당에서 키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생각을 바꿨다. 현지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로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케냐에 와서 먹은 망고와 아보카도는 이제껏 먹은 것과 맛이 너무 달라 깜짝 놀랐다. 엄청난 신선함과 달콤함, 고소함 들이 먹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이곳의 딸기는 세상 맛이 없다. 정말 정말 맛이 없고 비싸서 깜짝 놀랐다. 한국의 딸기는 정말 천국의 맛이다. 그때 알았다. 어디서든 현지의 음식이 가장 맛있구나. 돌아오기 전에 딸기가 저렴하던 때라 하루에 3000원짜리 딸기를 한팩씩 먹고 왔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딸기 잼을 만들어가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가서는 망고를 열심히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착한 날부터 매일매일 애플망고를 먹고 있다. 1kg에 2000원 정도이며 맛은 말할 것도 없이 좋다.
그 와중에 포기하지 못한 것은 고춧가루이다. 고춧가루는 정말 구하기가 어렵고 대체품을 찾기가 어렵다. 모든 음식을 포기해도 사실 김치와 고춧가루가 들어간 엄청나게 많은 한국 요리 (오이무침, 비빔국수, 떡볶이, 양념치킨, 생선조림 등등)를 포기하기에 나와 내 남편은 한국인이다. 앞으로도 어딘가로 또 가게 된다면 나는 고춧가루를 잔뜩 넣은 캐리어를 하나 들고 가려고 한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오*기 사골 가루가 아주 유용하다. 500g이면 오래도록 먹고 처음 도착해서 먹을 음식이 많지 않은 아이에게 그나마 먹을 만한 사골국을 끓여줄 수 있다. 액상은 오다가 터지면 감당이 안되고 무거워서 고민이었는데 사골국 가루를 보고 아주 잽싸게 구입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생각보다 된장이나 고추장은 쓰지 않아도 괜찮다. 간장은 세계 모든 마트에 대부분 들어와 있다. 한국 간장은 아니지만 뭐 맛은 비슷하다. 젓갈도 피시소스를 사서 쓰면 더 좋다. 내 입에는 피시소스가 멸치액젓보다 맛있었다. 또 시판 된장이나 고추장은 이곳 한인마트에서도 구할 수 있다. 라면은 비싸긴 해도 까르푸에도 팔고 있으며 (신라면 하나에 2300원 정도 한다) 맛이 조금 다르지만 파도, 배추도, 무도 있다.
인스턴트 팟을 배로 보냈는데 그건 잘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써봐야 알듯하다. 2년 전에 소갈비찜을 3일 동안 하다가 몸살이 났었기 때문에 기필코 찜기 같은 걸 사 가지고 와야지 했다. 여기 소고기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유난히 질기다. 방목을 하는 건지 암튼 질기고 지방이 많이 없어서 구워 먹기는 좀 어렵지만 국을 끓이거나 찜을 해 먹기는 괜찮다. 나는 그냥 구운 고기나 고깃국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와 남편이 워낙 좋아해 정기적으로 끓인다.
이번에 특히 열심히 챙긴 것은 영양제다. 2년간 혼자 살며 건강이 많이 망가진 남편을 위해 또 하루에 영양제를 12개씩 먹는 나를 위해 아이를 위해 아이허브의 온갖 프로모션을 이용해서 수십만 원어치의 영양제를 들였다. 커즈와일이라는 구글 엔지니어 (그 건반 커즈와일 맞다)가 1년에 10억 원어치도 넘는 영양제를 먹고 건강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좀 채워 넣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물 베이스가 아닌 것만 골라서 잘 먹고 있다. 여담으로 캡슐 같은 건 많은 경우 돈피(돼지껍질)로 만든다. 아이허브는 vegan표시가 되어 있는 영양제를 골라 살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당연히 아이허브 광고 아님)
마당에 있는 거대한 바나나 나무와 야옹이 남매 써니와 버니
지금 나는 바나나 잎이 펄럭거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아침 6시면 눈이 떠져서 (시차 적응을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나는 패턴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일어나 마당을 드나드는 2마리 고양이 밥을 주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한국에서, 서울에서의 나는 늘 부족한 인간이었다. 박사학위도 보잘것없고 1년간 놀고 있는 모습도 한심했다. 누구나 달리는 그곳에서 간신히 한 걸음씩 걸음을 떼는 나는 지렁이 같았다. 화려한 인스타 피드를 애써 외면했지만 당근 마켓에서 명품 같은 걸 싸게 사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있어 보이기"위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위해 애썼다. 그 애씀이 독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보는데 쇼핑리스트는 대부분 소박하다. 감자, 양파, 오이, 당근을 꼼꼼하게 메모한다. 한 줄에 2000원짜리 바게트 빵 하나면 장보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어쩌면 나는 온전한 나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쇼핑앱을 열지 않는 나에게 이곳에서 이어갈 소비 단식일기는 어떻게 될지 나조차도 궁금하다.
물론 아이 장난감 산다고 이미 아마존에서 여기까지 배송비가 얼마인지 알아본 건 비밀이다 (쉿) 그리고 내 코인은 지난주에 -100만 원과 +50만 원을 오르내리고 있는데 어디서 팔아야 하는지 정말 단타를 치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미국 주식은 날이 갈수록 오르고 한국 주식은 날이 갈수록 내리고 있다. 이렇게 헷징을 하는 건가 싶지만 low risk low return인가 싶기도 하다. 뭐 아직은 초보 투자자로서 마이너스가 안 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지난 구독자 600명 돌파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해요 :) 댓글로도 달았는데 제 이메일이나 인스타 DM으로 연락 가능한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제가 선물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