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집안의 기둥이 되어 살아갔다.
"이 추운 날 어린것을 데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왔냐."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이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큰 애가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등에 업고 20리는 될 만한 거리를 걸어서 왔다. 얼굴이 얼어서 벌게 가지고 키도 조그만 게 달덩이 같이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엄마 보겠다고 그 먼 거리를 걸어왔다.
"아기가 엄마 보고 싶은지 자꾸만 우는데 어떻게 해요."
힘들게 온 아이를 반기지는 못하고 타박만 했다. 이제 열 살이 됐을 뿐인데 세 살 터울인 여동생,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 그리고 이 갓난쟁이까지 동생이 셋이었다. 어린것이 돈 벌러 나간 엄마 때문에 어린 동생들 보고 살림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다짐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 버렸고 순덕은 그렇게 못난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왜 우리한테 왔냐. 부잣집에 가서 태어났으면 호강하고 살았을 텐데'
명옥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영특해서 알려 주는 대로 척척 알아듣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잘했다. 어린것이 살림도 얼마나 야무지게 해 놓는지 엄마보다 낫지 싶을 때도 있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어려울 때라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더러 있었는데 명옥이는 집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동생들을 학교 운동에 풀어놓고 교실에 앉아 공부를 하곤 했다.
그렇게 공부를 했어도 명옥이는 시험만 보면 1등이었다. 아이가 1등을 할 때마다 더럭 겁이 났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그냥 둘 수도 없고 여자 아이를 공부시킨다고 하면 남편은 용납이 안 될 사람이었고, 살림살이도 녹록지 않아 딸아이를 공부시키는 건 언감생심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아이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못 시키는 그 마음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기도 했다.
하루는 봉투 붙이는 일을 밤새도록 하고 있는데 옆에서 명옥이는 눈을 끔벅끔벅 거리며 같이 돕고 있다가는 상장을 모조리 갖고 나와 북북 찢고 있었다.
"너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상장을 왜 갑자기 찢는 거야?"
"엄마가 졸려 죽겠는데 이 놈의 봉투 붙이는 거 그만둘 생각도 안 하고 부화가 나서 그래요."
"그럼 그만하고 자면 되지. 왜 상장이 뭐라고 하든? 상장이 뭔 잘못이 있다고 찢는 거야?"
"몰라요. 몰라.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요."
아이는 이 집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해봤자 결국 봉투나 붙이고 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은 사람을 작게 만들고 꿈을 꾸지 못하게 한다는 걸 아이는 진즉 알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에게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부모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가슴을 누가 잡고 조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래, 이 어미가 죄인이구나.'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못 먹고살아서 얼굴에 버짐이 하얗게 피어있고, 볼이 벌겋게 물들어 곤이 잠든 네 명의 아이들을 보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이 천사 같은 아이들을 우리에게 보낸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새 고이 잠든 명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편을 닮아 이마가 반듯하고 눈썹이 가지런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아가, 잘 살아야 한다. 이 못난 엄마 아버지처럼 살지 말고 당당하고 굳세게 잘 살아야 한다.'
옥구슬처럼 예쁜 명옥이는 엄마의 한숨을 먹고 자라 말없이 묵묵하게 맏이로서 집안을 챙기는 일찍 철이 든 아이가 되었다. 작은 키에 몸도 자그마한 명옥이는 자신의 등에 업힌 동생들을 거두고 책임지며 그렇게 집안의 기둥이 되어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