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버스는 한산했다. 출근 시간 버스에 탄 사람들의 긴장되고 조급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여유롭게 버스 창밖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버스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주부로 보이는 여자들과 노인들이었다.
버스 뒤쪽에서 어린아이의 칭얼대는 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여자의 목소리가 버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마음이 불쾌해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여자는 사람들을 의식한 듯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칭얼대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모습이 낯이 익은 듯하여 기억 속에 있는 여러 얼굴을 더듬었다.
잠시 후 여자와 아이가 하차 문 앞에 다가서는 게 보였다. 나는 자석처럼 이끌려 여자와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막상 버스에서 내리니 여자를 따라가는 것이 계면쩍게 여겨져 여자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저기, 혹시 강원사대부고 나온 김광현 아닌가요?”
목소리를 듣자 바로 ‘손미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너 손미희지. 버스에서 봤을 때 얼굴이 낯이 익다 했어. 하나도 안 변했네. 그래로야.”
나는 우리 또래의 여자들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미희의 모습에 놀랐지만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아이가 예쁘네. 아이가 어린 거 보니 둘째?”
“아니야, 첫째야. 다섯 살이고... 결혼도 늦게 하고 아이도 잘 생기지 않아서 늦게 낳았어.”
“그랬구나. 우리 이렇게 만났는데 시간 괜찮으면 어디 가서 차 한 잔 하고 갈래?”
손미희와 나는 고등학교 때 방송반을 함께 했다. 미희는 아나운서였고 나는 PD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손미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의 미희는 당당하고 고집스러운 아이였다. 아나운서였지만 끊임없이 PD인 나에게 잔소리를 했고 나는 언제나 미희의 잔소리에 대응할 재간이 없었다.
미희의 목소리는 딕션이 좋고 적당히 무게가 있어 듣기에 편안했다. 미희는 강원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는 서울에 오게 되면서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20년이 지나 서울 땅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 사범대 다녔었잖아. 국어교육학과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선생님?”
“아니. 교사는 조금 하다가 그만뒀어. 남편이 아이 기르면서 가정을 돌보기를 원해서.”
“그랬구나. 아깝네. 좋은 선생님이었을 것 같은데.”
“너는? 신문방송학과 갔었잖아.”
“나는 졸업하고 방송사 시험은 다 떨어지고 특채로 입사해서 중랑구청 홍보실에 있어.”
한 시간 정도 그간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바닥나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고, 미희 옆에 앉아 있던 아이가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깨어 칭얼대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그만 갈까?”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다음에 또 만나자는 빈 소리를 하며 헤어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구부정하니 위태위태하게 걸어가고 있는 미희의 뒷모습을 봤다. 가끔 미희를 떠올릴 때면 어디에선가 당당하게 커리우먼의 모습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상한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미희의 모습을 보며 입안이 꺼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권 주사가 오늘은 꼭 술 한 잔을 하고 가자고 하여 어쩔수 없이 퇴근 후 술을 마셨다. 권 주사는 나보다 세 살 위지만 공무원 시험에 늦게 합격해 나보다 직급은 낮았다. 소주 두 병 정도 마시자 권 주사는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했다.
“계장님은 결혼하지 마세요. 결혼 전에 예뻤던 여자는 없고 애 엄마만 있지 말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웬 시들어 빠진 파뿌리 같은 여자가 눈은 퀭해서 앉아 있는데, 아주 보기 싫어요.”
권 주사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와이프에 대한 불만을줄줄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혼도 안 해 본 나에게 굳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 모양이 보기 싫어 그만 집에 가자고 했다.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을 혼자 들여보낼 수가 없어 택시를 타고 권 주사네 집까지 같이 갔다. 택시에서 내리자 권 주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같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권 주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14층에서 문이 열렸다. 1402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야, 문 열어. 서방님 오셨는데. 뭐 하는 거야?”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낯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권 주사를 계단에 앉혀 놓고 계단 아래로 급하게 뛰어내려 갔다.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미희가 초췌한 얼굴로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권 주사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 없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쓴 약을 한 움큼 입에 물고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하늘을 보니 달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괜스레 밝은 달이 미워져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