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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맑음 스튜디오 Jul 01. 2021

크고 눈에 띄게 하는 일

웃는 장어 포스터를 디자인하다가 깨달은 일

  "포스터에 크게 웃는 장어를 그려주세요."

네?


  "장어 배에는 '정력의 왕'이라고 눈에 띄게 적어주세요."

네???


  내가 동네 간판집에서 간판이나 메뉴판을 디자인할 때 주문받은 내용이다.

때는 2015년 여름,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저녁 7시에 퇴근하고, 하루에 5곳 이상의 가게들의 로고, 간판, 메뉴판, 선팅, 명함을 디자인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다른 디자이너들은 안 하던 시공업자 소위 '실장'님들이 '현장일'도 함께 시키며 간판과 현수막 조립까지 도맡았다. 그러고 달에 100만 원 정도 받았다. 석 달만에 그만뒀다.


  석 달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특이한 손님들이 오고 갔다. 앞서 얘기한 장어구이 홍보 포스터라던지, 현수막에 수십 번의 수정을 요구하는 스님이라던지, 퍼져나가는 물결 효과를 넣어주는데 노란색으로 넣어달라던 한복가게라던지.




  다양한 손님들이 있지만 하나 같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크게" 그리고 "눈에 띄게"이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그 요구에 바로 굴복하지 않았다. 심미성을 강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디자인한 것들은 적재적소 하게 위치하게 했다. 체념하고 굴복하는 데 일주일 걸렸다.


왼쪽이 주문 내용, 오른쪽이 내가 당시 만든 포스터이다


    그렇게 오는 손님마다 크고 눈에 띄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었고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를 적고 흰 테두리와 그림자를 넣는다. 다른 텍스트가 더 있다면 물론 그 텍스트도 크게, 눈에 띄게. 텍스트와 이미지만 좀 달라질 뿐, 크고 눈에 띄는 간판, 선팅, 현수막들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디자인들이 너도나도 "날 좀 봐줘"를 외쳐댔다. "이야 이렇게 키워도 안 봐? 독하다 독해."





  그러다 알밤 농장의 명함 디자인 의뢰가 왔다.

알밤 사진 크게 구석에 넣어두고 글자는 빨갛게 "ㅇㅇ알밤 농장" 새겨두었다. 흰 테두리와 그림자도 잊지 않았다. 전화번호와 이름, 주소는 모두 9pt 크기 이상으로 적고 가장 밑에는 채워진 막대를 깔고 계좌번호를 굵직하고 흰 글씨로 적어둔다. 이쯤 되면 돈 달라고 명함이 협박하는 것 같다.


  세 시간쯤 뒤, 알밤 농장의 사장님이 명함 좀 보자고 방문했다. 땡볕에서 밤을 따고 바로 오신 모습이었다. 입은 상의와 조끼 하며, 청바지와 모자도, 그 모자를 뚫고 태워진 피부까지도 알밤 농장의 농부였다. 앞서 크고 눈에 띄게 만든 명함을 보여드렸다. 다른 간판과 현수막도 만들어야 하던 나는 빨리 통과해주길 바랐다.



  "혹시 더 수정돼유?" 농장 사장님이 말했다. 바로 통과가 안돼 귀찮았으나 마다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이거보다 더 크게 하려고?'라고 생각하며 바짝 겁이 났다.




  "글자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네?


  "글자는 빨간색 밤 농장이랑 어울리는 색으로 바꿔주세요."

네???


  일하며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을 듣고 '크고 눈에 띄게'하기보다 알밤 농장답게, 어울리게, 괜찮게 디자인했다. 그 작은 명함 안에 오밀조밀 내용들이 정리됐다.


  그제야 "이제 좀 괜찮네유." 농장 사장님이 말했고, 괜찮은 명함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직업군과, 겉모습을 보고 평소대로 크고 눈에 띄게 하는 일을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낯부끄러웠다. 빨리, 많이 뽑아내기만 하면 다였다고 느꼈던 걸까? 디자인을 뽑아내기만 하는 자판기가 되기 싫다고 하면서 주문의 삿대질을 기다리기만 한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 겉모습과 직업 등으로 무시하지 않게 됐다. 작년에 50세는 넘기신 여성분께 홈페이지 제작을 의뢰받았는데, 어떤 식으로 개발되었으며 왜 이걸 선택했는지 내용과 설명을 스프레드시트로 제작해서 드렸었다. (내가 개발을 한 뒤에 추가 개발이나 유지보수를 다른 회사에 부탁하게 될 수도 있기에 그런 상황을 위해서라도 프로젝트를 최대한 정리하는 편이다.)



  개발이 완료되어 약 1년이 지나 최근에 다시 연락이 왔다. 추가 디자인 및 개발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미팅을 가지면서 그때처럼, 설명을 해드리고 문서를 정리해드렸다.




  "이런 게 참 감사해요."

네?


  "저희 나이 때쯤 되면, 전문가분들이 저희를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거든요.

이렇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드물어요. 바보 취급하기도 하죠.

실제로도 설명받아도 다 이해하진 못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 주는 것이 참 감사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프로젝트도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보통 이런 약속은 지켜지기가 어렵겠지만. 이 약속은 지켜질 것 같다.



  글자와 로고가 아무리 크고, 눈에 띄게 만들어도 눈에 밟히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을 때가 많다. 그런 간판, 현수막은 단순히 '잘 보일' 뿐이다. 진짜 '눈에 띄'는 것들은 마치 밤 농장을 더 밤 농장답게 만든 그 명함 같은 것이 아닐까. 오밀조밀, 적절한 위치에, 잘 있는 것. 그리고 사물도, 사람도 바보 취급하지 않는 것. 그런 게 생각은 크고, 마음이 눈에 띄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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