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활자중독의 고비가 몇 번 있었는데 한 번은 그림책에 꽂혀서 많이 읽었다. 존 버닝햄의 고전을 좋아했고 <고릴라>로 유명한 앤서니 브라운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같은 전시를 두 번 다녀올 만큼 좋아했다. 로알드 달의 일러스트레이터인 퀀틴 블레이크가 반짝이는 수채로 그린 동화는 화첩처럼 보는 맛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노 요코를 각별히 사랑한다.
대표작인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울림은 아무리 읽어도 낡지를 않는다. 아주 오래전 꿈에선가 한 번 보고 그리워 한 이를 백만 번째 다시 태어난 어느 생에서야 마주친 듯이, 억장이 무너진다. 운명이 있을 줄 알았어. 사랑하지 않으면 백만 번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짐짓 느슨한 이야기는 음각으로 새긴 글자와 같아서 어렴풋할지라도, 그 여운은 펜으로 힘주어 적은 글보다도 길게 남는다. 알수록 더 잘 보이는 건 잘 쓴 동화의 묘미다. 사노 요코의 스토리텔링이 그렇다. 그 얇은 책을 한 권만 갖기가 아쉬워서 번역본 마다 사 모았다. <하늘을 나는 사자>는 한바탕 울고 싶을 때마다 꺼내보면 어느 장면에서 여지없이 터진다. 편지글 <친애하는 미스터 최>는 무명시절 사노 요코로부터 편지를 받아 보는 막역지우의 심정으로 모호한 설렘으로 아껴 읽었다. 20대의 베를린 유학 시절 만난 사노 요코와 한국인 최정호가 각자의 타지에서 40년간 나눈 편지묶음을 세상에 내놓으며, 최 교수는 자신은 “장차 타이틀매치에 나서 싸울 복서의 필력을 기르는 연습용 샌드백”이었노라 말한다. 요코는 답신이 제 때 오지 않아도 독백하듯이 마구 써 재꼈다고 한다. 얄밉게 곁눈질하는 듯 행간에서 읽히는 모든 감정이 사랑스럽고 결정적인 순간에 눈물겹다.
1967. 베를린
친애하는, 외설스런 벗이여
제 서툰 글씨와 두서없는 문장은 일본 평균에도 미치지 못해요. 이 편지는 추운 날 난롯불에 태워 버리세요.
지금 병원에 가 보려고요. 늘 생각하는데 제 얼굴의 부스럼은 제 안쪽에 있는 추잡함이 솟아 나온 것 같아요.
병원에 가 봤자 소용없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아주 나쁜 사람인데 무척 훌륭한 얼굴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당신처럼.
저는 의학을 전혀 믿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 같은 나쁜이가 와서 “너는 나을 것이다”하고 제 얼굴을 쓰다듬어 주어야 나을 것 같아요. 혹 심심하면 전화 주세요.
친애하는, 쓸모없는 벗이여
안녕.
온몸으로 당신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는 걸 항상 느끼는 당신의 친구가
1981. 1. 19.
그립고 그리운,
친애하는 미스터 최
편지 잘 받았습니다.
역시 미스터 최는 어딜 가도 행운이 따라다니는가 보네요.
비너스의 언덕 위에서 “세시봉”이라니. 우아한 저택가가, 사실은 가장 음란한 거 아닌가요? 세시봉.
교회 종소리가 청춘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고요? 마음대로 하세요.
(…)
미스터 최, 저는 정말 미스터 최를 존경해요.
전 세계에 걸쳐 바람피우는 돈 후안일지라도.
물론 저는 미스터 최의 뛰어난 두뇌와 지성과 교양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겠지요.
저는 미스터 최의 조국애를 가장 존경합니다. 그것만은 신성불가침의 무서운 빛입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나라 사랑을 느낄 때 심장이 움츠러들 만큼 두렵습니다.
한국의 대학교수가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가끔 신문에 나와요. 저는 그때마다 움츠러듭니다.
미스터 최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동시에 먼 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 최의 애국심이 두렵습니다. 엉뚱한 착각일지 모르지만 사람은 엉뚱한 착각으로 사는 존재이니 용서하세요.
제가 예술가 나부랭이라면 엉뚱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예술가는 정신이 약간 돌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번에는 왜 제가 미스터 최를 존경하는지 전하고 싶었어요.
다음 편지는 왜 제가 미스터 최를 경멸하는가 하는 테마로 쓰겠습니다.
- <친애하는 미스터 최>
누군갈 궁금해하다, 흠모하다, 미워했다, 용서했다가 마침내 그리우면 그건 사랑이라고 한다. 연애하지도 않았는데 이리도 애틋하다는 걸 이제야 안다. 수십 통의 편지가 오갔던 중 어디서부터는 사랑이었을까. 어떤 감정의 경계는 너무나 미묘해서, 그 위에 시간을 쌓고 얼마간 묵어나야 실체를 깨치곤 한다. 좋아하고 있다고. 허나 마음의 껍데기에 칼 꼽아 발골하는 과정에도 분명 시차가 존재하고, 해 끼칠 리 없는 마음은 눈치도 없어서 쫓기는 법을 모른다. 보통 제대로 가는 점입가경은 호흡이 길다. 타이밍이라든지 오해라든지 결과론적인 이야기는 재미 없으니 입에 담지 않기로 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먼 훗날에야 요코는 “죽은 오빠 다음으로 나는 멀고 아득한 미스터 최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인간 마음이란 여닫이문 같은 거다. 그러고 보면 요코는 사람 몸에 난 손잡이가 어디에 달렸는지를 잘 안다. 그걸 찾아내 잡아당기고 마침내 문을 열어 자기 시공간으로 초대한다. 참 좋은 문장가이다. 낭랑한 문체 이면에 일부러 뒤틀리고 어딘가 무정한 데가, 인간사의 정수를 드러내는 시선이 독특하다. 그래서 좋아한다. 아동용이라면서 매운맛으로 다스리는 그림책도 재밌고, 에세이는 더 재밌다. 거침없이 읽히는 문장이 난잡스럽고 웃긴데 태도는 담대하며 끝내 따스하다. 가만히 읽기만 하는데 깊은 데서부터 채워진다. 이 여자가 인생을 사랑하고 때로 쏘아보며, 무심한 듯 근성 있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취향이 저급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마지막 순간에 줄리(가수 사와다 겐지)의 <오늘 밤 결정할 거야>를 듣고 싶다.
요즘은 줄리처럼 나른하면서도 퇴폐적인 미청년이 없다. 모두가 쓸데없이 명랑할 뿐이다.
어째서 그렇게 밝은 걸까.
옛날에는 젊은 재능이 문학으로 쏠렸다. 어두웠다. 그다음에는 만화로 쏠렸다.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다양하게 존재했다. 지금은 예능에 쏠려 있다.
나는 이 현상으로 세상 물정을 분석할 수 없다. 아마 평론가라면 이것저것 분석하겠지만, 사실은 평론이 가장 수상쩍다. 내 뇌는 분석이나 평론을 하지 않는다. “우와, 진짜 대단하다!”라는 게 가장 감탄했을 때의 표현이다.
줄리의 콘서트장에서도 “우와, 진짜 대단하다!”라고 감탄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세상만사에 감탄하고 싶다.
- <죽는 게 뭐라고>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한다.
아버지는 설교를 좋아했다. 저녁 식사 때면 반드시 훈계를 늘어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말했다.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거라.”
그래서 아버지는 가난한 채 쉰 살로 죽었다.
목숨이 지구보다 중하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이라크 아이의 목숨과 장기이식에 몇억 엔이나 쓰는 사람의 목숨은 같지 않다.
나도 목숨을 아끼고 싶지 않다.
오빠는 열한 살 때, 동생은 네 살 때 이라크 아이들처럼 죽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은 지구보다 무거울지도 모른다.
싱글벙글 씨는 내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사노 씨, 먼저 가서 터 좀 닦아놔. 내 자리도 좀 봐놓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 <사는 게 뭐라고>
“아, 일 안 하고 싶다”면서 평생 책을 170권이나 썼다. 전후 세대라 집안이 한 번 망한 이래로 가난했고 나중엔 편모로서 하나뿐인 아들을 건사하려는 생계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크게 성공하고 거장으로 거듭나고서도 72세에 암으로 작고하기까지 쉬지 않고 쓴 것이다. 놀기만 하는 건 죄악이라던 입에 발린 말은 핑계였을지도. 타고난 예술가의 숙명이었을 테다. 배짱 내지 경험치로 살아낸 삶의 구석구석을 모조리 글과 그림으로 치환했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 대쪽 같은 성미와 문학적 다산성에 가닿을 수가 없다.
나는 상상력 풍부하게 살고 싶다.
불손하지만, 많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배웠다.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만, 가난뱅이는 가난을 자랑한다.
모두들 자랑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저녁 설교 중 이런 말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이었겠지.
- <죽는 게 뭐라고>
작가의 문장을 좋아하면 그의 삶을, 삶의 태도를 좋아하게 된다. 책상 앞에서만 앉아 사는 요즘도 행복이란 무엇일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사노 요코가 행복에 관해 쓴 글을 읽는다. 고뇌하는 영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행복은 자각이 없는 사람에게만 찾아오고 사물을 깊이 추구하려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암흑기에 온 가족이 난민으로 떠돌며 배를 곯다가 남동생과 오빠 그리고 아버지까지 여읜 때 요코가 고작 열아홉이었다. 냉혈한 어머니 밑에서 심각한 마더콤플렉스였다고 고백한 그는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살다 끝내는 암으로 세상을 떴다. 두 번 이혼했기에 갈 때는 독신이었다. 그런 사람이 행복에 관하여 쓴 글은 아이러니하게 더 믿음이 간다. 요코는 고뇌하는 사람 쪽이었을까. 다 알 수는 없다.
최근엔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을 샀는데 11화 염미정의 독백 부분만 주로 읽는다. “91년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공자 말씀이 모든 사람은 인생을 두 번 산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은 인생을 오직 한 번만 산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작된다고. 인생을 분명 선형적 시간의 흐름대로 사는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를 때마다 죽도록 궁금해진다. 고뇌하는 자는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존재가 그저 표류하는 먼지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두 번째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생생한 감각을 사노 요코의 글에서 찾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