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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로 May 15. 2023

허트로커

가끔가다 곱씹는 일이 있다. 사내 행사자리 연단에서 편지를 읽은 일이다. 1년짜리 인턴들의 정규직 전환 기념 패밀리 디너였다. 여의도 콘래드 호텔 가장 큰 볼룸의 라운드 테이블마다 임원들을 앉히고 신입사원들과 초대받은 그 가족이 둘러앉았다. 초콜릿 분수가 흐르는 디저트 뷔페와 메인요리가 두 번 나오는 풀코스로 대접받았고, 비싸게 입고 온 부모들이 들뜬 얼굴로 자녀의 상사들의 말을 경청했다. 유리로 만든 축하패와 가족들 이름이 박힌 명예 사원증도 나눠 받았다. 명백하다 못해 과한 메시지였다. 무슨 뽕에 흠뻑 젖어서 그만 몸을 맡겨버리고 싶게 만드는 그런 환대였다.


글을 쓴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부모님 전 상서’란 제목의 축사를 내가 했어야 됐다. 나는 신파를 좀 쓸 줄 안다. 이미 감격에 들뜬 장내의 피날레를 장식할 사회 초년생의 소회를 낭독했고 어떤 부모는 울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강단으로 올라와 나를 얼싸안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 편지의 한 구절이다.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를 타고 금융센터로 출근해 책상 앞에 앉습니다. 이제 관성으로 사는 어른의 삶을 알아갑니다.


관성으로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다. 정장에 구두를 신고 9 to 6로 일하는 어엿한 성인으로 자랐다는 감회였다. 바깥에서 돈을 벌어 집으로 갖다 주는 삶과 고충을 맛보기 했다는 존중의 의미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렇게 함부로 아는 체해선 안 됐다고. 관성의 진짜 의미를, 남을 울리려고 쓴 아무런 성찰 없는 편지에 대하여, 적어도 나에게는 그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 영업사원 생활과 각종 실적 차트와 금융치료라는 무통주사의 쳇바퀴를 알기까지 3년 정도 걸렸다. 그런 삶은 원해본 적이 없었다.


동료들의 예기치 못한 부고를 일주일새 두 번이나 겪고서 얼마 있다 회사를 관뒀다. 부조금을 낼 것인가를 셈하고,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영업 딜을 자기가 먹겠다던 어떤 시니어들의 모습은 기가 막혔다.


닳고 닳은 말일지라도 퇴사 이후로는 진정성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나는 눈길이 허공에 가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저 사람 딴생각하고 있구나. 스스로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막 떠드는 이들은 나를 두렵게 했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그것의 모양은 돈욕심이나 계급론이기도 하고, 나잇값에 등 떠밀린 세월이기도 콤플렉스 혹은 프로파간다이기도 했다. 그것은 파괴적이다. 고통을 동반한 놀잇감은 중독을 먹고 자라나 살밑으로 파고든다.


무엇에 잡아먹혀 사시나요?


어린왕자의 술꾼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술을 마셨다. 영화 허트 로커의 윌리엄 중사는 전쟁의 폭력성에 중독되어 고통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자신의 정체와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을 그는 차단한다. 술에 취한 밤이면 단단한 헬멧을 장착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것이 사실은 단지 전쟁 영화가 아니라는 깨우침이 잔인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전쟁광이 된 연유를 묻지 않는다. 앞뒤 맥락을 제거한 채 관성만 남은 837개의 폭발물 처리 전력과 전쟁에 대한 미친 집착만 반복된다. 아마도 그가 살아있는 한. 중사는 자꾸 자기 목숨을 테스트한다. 숙소의 방호 구조물을 뜯어내거나 가장 위험한 순간에 방탄복을 벗어던지고 폭탄으로 돌진한다. 신경세포는 아드레날린에 절여져 문드러졌으리라. 온몸에 폭발물을 두른 채 자살당하여 갈가리 찢긴 어느 가장의 최후를 보면서도 무덤덤하다.


돌이키지 못할 인간성에 대한 부채의식은 흔적만 남았다. 전쟁보다 큰 고통이다. 그래서 더욱 일부러 본질을 빗겨선다. 고향의 아내와 갓난 아들은 외면하면서 애먼 군부대 DVD 팔이 소년에게 마음을 준다. 어느 날 무장단체 소굴에서 장기가 파인 채 생체 폭탄으로 죽은 아이가 그 소년인 줄로 알고 분개하며 무리한 복수를 감행하고, 정작 죽은 것이 그가 아닌 것을 알았을 때에는 대꾸 없이 지나쳐버린다. 자주 숨는 버릇 탓에 현실세계가 오히려 망령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의 앵글 가장자리에 전쟁통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꾸 등장하는 것이다. 창가에 서서 지나치는 미군들과 여기저기서 터지는 집과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익명의 눈빛들. 눈이 멀어버린 광기에 짓눌린 전쟁 피해자들이 분명히 그곳에 존재했다. 전쟁통의 관성은 현실의 일상을 깨부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영화 궁극의 Jack-in-a-box 씬은 관성의 삶을 축복하던 그날 연단의 내 모습을 창피하게 만든다.


William: Maybe you'll realize it's just a piece of tin and a stuffed animal, but the older you get, the fewer things you really love, and by the time you get to my age, maybe it's only one or two things. With me, I think it's one.


감각은 무뎌질지라도 마취된 채 살아가지 않기를.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물음과 각성은 그래서 중요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전장의 한가운데서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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