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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 May 15. 2023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연극 오셀로와 편지쓰기 캠페인에 대한 단상

대륙법상 형사소송법에 전문傳聞증거라는 개념이 있다. 직접 겪지 않고 누구에게서 들은 말이나 진술서에 글로 써서 안 사실은 유죄의 증거로서 엄격하게 다뤄지는데, 애초에 그 말을 한 자가 공판에 나와 그게 사실이 맞다고 인정하거나 피고인에게 반대신문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절차가 더 필요하다. 말이 전해지면서 진실이 희석될 가능성을 염두한 것이다.


전문증거가 그러하듯 말이란 결국 재연이다. 본연本然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공기를 만나 한 번씩은 변질한다. 내가 한 말, 바깥으로부터 얻는 모든 텍스트, 입에서 입을 거쳐 전하는 소리들이 사실은 순결하게 간직된 원본일 리 없다는 강박을 질리도록 파고든 적이 있다. 자꾸 오해했으며, 몸 안에 갇힌 날것의 영감과 글자들은 피부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평생 혼자 둥둥 떠다닌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면 너무 외로우니까 무서웠다.


완전무결한 내면을 목격한 자가

일생을 통틀어 자기 자신뿐이라면?


담고자 하는 원형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텍스트에 관해 공부한 것이 그쯤이다. 나는 그것들이 뒤섞여 어떻게 표현이 완성되고 영감의 전이가 이루어지는지가 궁금했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찾아 읽었는데 그건 너무 어려웠고,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연기한 박유림 배우의 인터뷰 기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도움이 됐다. 감독은 배우들에게 지문을 무미건조하게 반복하여 읽을 것을 주문했다.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신다는 지문을 오십 번쯤 읽으면, 정말로 목이 말라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게 된다고 한다. 대본의 지문이 거꾸로 욕구에 불 지른다는 개념이 충격적이었다. 순간 배우의 연기는 무언갈 베낀 재연이 아닌 새로운 실존으로 나아간다.


표현을 위해 가공된 텍스트 그 자체의 오리지널리티, 실존과 본질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그리고 그 사실이 중요하긴 한 건지, 그것들의 상호작용과 생산성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나를 환기해 주었다. 강박을 내려두니 상황이 나아졌다. 속 없는 비유와 상징이라 폄하했으나 텍스트 그 자체의 위력은 강력하다. 말과 글의 실존에서 본질이 새로 피어난다. 처음 이 사실을 깨달은 걸음마를 떼면서 그것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1.

셰익스피어 희곡 오셀로는 십 대 때 처음 읽고 학교 연극반 공연과 영화로 몇 번 더 봤다. 극 중 에밀리아는 단지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도우미로만 기억했는데 어제 새로 본 연극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남자의 열등감이 자극한 불신이 영원할 수 있었던 사랑과 평화를 깨뜨리고,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자기 부하 카시오와 바람나서 그에게 손수건을 애정의 증표로 줬다고 오해한다. 손수건은 오셀로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데스데모나에게 준 선물이다. 모성이 사랑의 근본이듯 아무런 거리낌 없는 순수한 마음은 손수건으로 상징된다. 오셀로가 자기 부인인 에밀리아와 잤다고 의심한 이아고는 복수를 꾸미면서 에밀리아에게 그 손수건을 가져오라고 시키고, 그걸 카시오의 침실에 놓아 오셀로의 의심에 교묘하게 불을 지핀다. 아무 확증도 없이 말로 꾸민 정황이 의심을 낳고 그 의심이 질투를 폭주시켜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죽여버린다. 갈등이 정점을 찍은 뒤에야 사태를 파악한 에밀리아가 나서 모든 것이 이아고의 계략임을 고한다. 이런 대사가 있었다.


(이아고에게) 그 손수건 말야, 손수건!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줬던, 내가 당신에게 줬던 손수건!


내가 당신에게 줬던 그 손수건이라니. 절규를 듣는데 난데없이 가슴이 찢어져서 막 울었다. 마치 배우가 그 대사에 뭔갈 심어놓은 것 같았다. 한때 에밀리아가 이아고에게 줬을 사랑도 데스데모나의 순애보와 다름없었으리라…. 그제야 에밀리아의 아픔이 보였다. 거기 그대로 있었던 진심을 의심하고, 그 대가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데 대한 원망과 깊은 상실감. 사랑이라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얄팍한 신뢰에 대한 분노. 에밀리아 역에 이렇게 몰입해서 본 적이 있던가. 그 날의 대사 한 줄은 내게로 와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2.

저번 날엔 동기와 점심을 먹고 캠퍼스를 조금 걷고 있는데 대학생 애들이 길을 막으면서 캠페인을 하고 있으니 잠깐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어떤 할머니의 사진이 인쇄된 판넬을 들고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희생자들을 위한 캠페인이라고 했다. 할머니들 얘기보다도 정부가 어쩌고 저쩌고를 길게 늘어놨다. 뭐라 설명을 뭉뚱그리더니 나보고 엽서에 편지를 쓰라면서 막무가내로 펜을 건넨다. 편지를 적으면 양금덕 할머니라는 분께 전해 줄 건데 아주 큰 위로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 뭐라고 적어요?


아 그러니까요… 위안부 피해자나 그런 분들께 드릴 말씀을 적는 겁니다. 어려우시면 제 것 샘플을 보고 참고하실래요? 아니, 아니요. 그런데 아까는 저보고 양금덕 할머니한테 편지를 적으라면서요. 이 분은 위안부가 아니라 공장에서 강제노역 당하셨다면서요. 누구신지도 모르는데 제가 뭐라고 말을 막 얹고 뭘 베껴요.


꼬투리 잡으면서 버티고 있으니깐 학교 사람이 나와서 여기 허락도 안 받고 좌판을 차리면 안 된다고 학생들의 신분을 물었다. 그래서 응원한다는 말만 짧게 적고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내내 후회했다. 차라리 그 편지를 찢어버리라고 다시 가서 말하고 싶었다. 아무 알맹이 없는 편지를 읽으면 양금덕 할머니가 정말 실망을 하고 말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까지 수요집회를 다녔었다. 할 말이 그게 다는 아니었는데.


구호를 위한 편지. 잘못 표현된 본심. 영감이든 이야기든 몸속에 든 것은 한 번씩 번역되어 나와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들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럼에도 진정성으로 재연된 말과 글 자체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이해와 공감이 경이롭다.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제각기 일어나는 화학작용은 결코 오독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의 단계라는 것을 안다. 깊은 내면에서 인간이 다 외롭지만, 표피에서나마 서로 이야기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다.




<Asteroid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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