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로 Aug 23. 2023

狂人日記

소리를 막 있는 대로 지르는데 대사가 좀 이상했다.


아으으으. 내가 진짜! 진짜 내가…!!


학교에서 시험 치는데 위층에서 지진이 난 거다. 분명 내 머리 위로 천장이 흔들렸다. 실제 상황인가? 사람 비명소리 같은 거였다. 비명소리에 가까웠다. 누구 면전에다 악을 쓰려는 목적을 갖기도 전에, 분노로 벌게진 몸뚱이가 팽창하다 더는 견딜 수 없어 터져 버리는 폭발음. 위층의 한 수험생이 자기가 말썽을 부리고는 되려 감독관에게 대들다 발악을 했다고 한다. 한 번만이 아니었다. 악다구니가 며칠을 반복해서 들렸다. 그 사람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집 가는 길에도 허공에 주먹을 지르고 발을 쿵쿵댔다. 화가 저만치 잔뜩 난 사람도 매일 시험을 치러는 오는구나. 시험을 보게는 해 주는구나.


수험공부 하다 보면 미친 사람 볼 기회가 아주 많다. 수험의 성지인 신림에는 사시 시절부터 전설로 내려오는 광인이 딱 두 분 계신다. 시험과 인고의 시간이 있다면 미친 자는 지역을 막론한다. 우리 동네에도 있다. 자기 몸이 송신탑이 되어서 지령을 받는다는 자.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도청을 당한다며 호소하는 자. 어떤 미침은 그 폭발하는 광경이 눈으로 보이는 미침이다. 그날의 미침이 그랬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으나 그 부분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너 두고 봐라, 죽여버린다도 아닌 “내가 진짜…“라니? 당신이 진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길래.


미친 사람이 내가 진짜 왜 얼마나 미쳤는지 무슨 말로 형언하든 간 미친 말에 불과하다. 곧이 들릴 리가 없기에. 저 사람 미친 건 남들이 대신 말해준다.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 그것들이 모여 침묵의 고고학이다. 공부하다 미친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그래서 그랬대. 저래서 저랬대. 어떤 레퍼토리든 절반 정도는 여흥이다. 그 자가 미칠수록 사족은 배가 된다. 미치는 게 나쁜가. 미침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미침을 도구로 남들 해코지하면 거기서부터 공식적으로 나쁜 거다. 내가 진짜 미쳐서, 내가 진짜로 이렇게 돌아버려서, 잘못 걸리면 패줄 줄 알아. 진짜 개미쳤네. 상대적으로 미치지 않은 자격에서 거기다 대고 이바구한다.


다들 미쳤다고 하는 어떤 할머니를 몰래 보러 다닌 적이 있다. 맥도널드 할머니는 정동에서 유명했는데 방송 타고는 전국구로 유명해졌다. 야자 시간에 혼자 나와서 서대문역부터 광화문까지 휘적휘적 걷는 게 여고생의 낙이었다. 걷다 보면 스타벅스 건물이 나온다. 2층 창가자리에 항상 그분이 있었다. 듣던 대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신문을 읽으면서. 먼발치라 보이지는 않았으나 코리아 헤럴드 영자신문이라고 들었다. 그 길 지날 때마다 할머니를 보러 갔다.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너무 길어 말갈기 같은 회색의 머리칼은 발치까지 드리우고. 서유럽 어느 도시 골목 어귀에서 볼 법한 집시의 낭만이었다. 사대문 밖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하니 그 동네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살아있는 전설을 내 눈으로 목도하는 심정은 경외감이다.


한국전쟁 직후 대학을 마치고 외무부에서 오래 근무했고, 가정을 꾸리진 않았으며 어떤 연유에서 노숙으로 전전한 지 십수 년 째라고. 사치가 너무 심해서 파산했다더라. 크게 사기를 당해서 그 충격에 떠돈다더라. 외국물을 좋아해서 맥도널드나 스타벅스에만 앉아 있는 것 아니겠냐. 할머니를 두고 만든 위키백과까지 있었다. 수틀리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어깃장 놓는다는 대목도 빼놓지 않았다. 3년간 지나다니며 그런 장면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산신령 같은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사계절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여느 할머니 답지 않게 영자신문을 읽고 남들처럼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지 않을 뿐이었다. 멀리서 본 표정은 항상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냥 늘 거기 있었다. 방송국 같은 데가 나서서 할머니 거처를 옮기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것으로 안다.


집 있는 사람들이 부랑자를 무서워한다. 정신이 헤까닥 해서 시설도 안 가고 막 돌아다니겠지 한다. 칼부림이라도 내면 어떡해. 서울역 노숙자들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도시공학을 좀 안다던가 했던 사람이 한 말이다. 구 서울역을 본떠다가 경기도 모처 벌판에 모형으로 짓는다. 노숙인들은 전부 거기에 데려다 놓는다. 그럼 어차피 거기가 서울인지 경기인지도 모르고 모형으로 된 서울역 주변을 또 하염없이 맴돌 거라는 거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어딘지 알게 뭐냐고. 이로써 시민들은 쾌적한 서울역 광장을 돌려받는다. 여기까지 말하고 괄괄대며 웃는데 그 웃음소리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무섭고 더럽고 싫으면 안 봐버리기. 나는 정상이고 깨끗하고 준수하니까. 안수찬 기자가 쓴 가난의 파편화에 대한 글을 좋아한다. 십 년은 더 된 기고문이나 르포 중에도 최고의 명문 중 하나다. 일부는 필사까지 했었다. 도시 재개발로 달동네가 밀리고 빈민가를 해체하면서 가난의 비가시화가 전략적으로 일어났다. 달동네 없는 도시에서 절대적 빈곤은 이제 티비나 모금광고에서나 보인다. 누가 굶어 죽는지 맞아 죽는지 왜 어떻게 가난한지 뉴스에 안 나면 모른다. 생존본능의 더듬이는 굳이 음지를 더듬지 않는다. 글을 옮기면서 가난을 모든 추함으로 치환하여 다시 읽는다. 추함을 안 보기로 해서 안 봐도 되는 편리한 세상이다. 빈곤이든 노숙자든 정신병자든. 그래서 다 치우고 남은 곳엔 누가 살까.


미쳐야지 미친다고 한다. 공부하면서 줄글을 파고들다 보면 그 미시의 세계에 갇혀버릴 때가 있다. 증거목록의 "내용부인(OOOX)"과 "내용부인 취지의 증거부동의(X)"의 미세한 차이로 하늘을 두 쪽 내고, 강제집행이나 시효 기산의 효력 발생시점 따위로 머리를 싸맨다. 나는 웃긴 실험을 한다. 뇌가 쪼여 맹맹해질 때까지 치닫고 나중에 휴식하면서 그 순간을 되뇐다. 그럼 눈앞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가 치울 때 초점이 잠시 흐려지는 그 느낌이다. 아까 좀 미쳤었군. 아까 왜 죽고 싶었더라. 평온해진 상태로 태도를 정정하고 다시 반복한다. 미쳤다가 안 미쳤다가 다시 미쳤다가 안 미치는 거다.


어떤 식으로도 미치지 않은 것은 사실 미친 것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어느 정도는 광기에 걸려있는 것. 덜 미친 사람들이 제대로 미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모이면 손가락질한다. 미친 사람들끼리도 너 정말로 미쳤다고 서로들 그런다. 맞는 말 같다. 살면서 안 미친 사람 본 적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Himn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