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큼 유능한 방문판매원을 본 일이 없다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되었다’ ‘올 때가 되었다’ 그러다 온 지도 모르게 다녀갔으며 물건을 손에 들린 채 잔돈까지 쥐어주는 것이다 마음먹기도 전에 모든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 달라졌고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진 것과 다르지 않은 경계에서 그림자는 지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책은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생기거나 마을버스 창가자리에 앉아있거나 냉장고 안에서 바나나와 같이 썩어가고 있다 존재라는 것은 부수적이다 하여 책은 자작극으로만 쓴다 문맥을 비집고 미루는 모양새는 자기가 쓰인 방식이다 비로소 책은 책이 된다 어제는 누군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도서관은 기차역이 아닌 만큼 오는 길에 주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기로 했으므로 모서리를 잡고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는다 모서리를 잡고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기의 장점은 군중 속에 왔다 간 사실을 비밀에 부침이며, 책은 하던 대로 머리를 빗었을 뿐인데 내가 따라 가르마를 바꾸어 짐짓 새 사람으로 며칠을 지어먹을 수 있음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