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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 Oct 12. 2023

벽과 벽 사이의 사람들

입구부터 막고 서 있으니 당해낼 방도가 없는 것이다. “특약에 동의하고 사인한 이상,” 보다 못한 관리소장이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벗으면 옷도 새로 갖춰서 타야 되거든요. 그… 여기 지금 다 소독한 데다, 그게 룰이에요. 안 그럼 냄새가 고약하게 배어서 지울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룰을 꿰고 있는 관리소장이라니.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서 냄새를 맡았다는 거지. 엘리베이터가 벗든지 말든지 새 옷이랑은 무슨 상관인가? “감이 안 오면 입주민 계시판을 잘 읽어보십쇼.”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응당의 책임이 따른다. 게다가 분리수거 날짜나 적어뒀겠거니 무심코 지나쳤던 게시판이 사실은 어떤 계시를 받아 적은 계시판이었다는 것. 계시판이라, 좀 근사한데. 나는 그런 것들 앞에서 작아진다.


어쩌죠? 어떻게 할까요?

-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야. 따라오시게.


다행히 레서판다가 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아파트의 가장 오래된 세입자로서 나와는 교대로 반상회에서 의결권을 대리 행사하는 자이다. 일종의 느슨한 바톤터치인 셈이지.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두 발로 서서 허리를 빳빳이 세워도 땅딸막한 키에, 털갈이를 하지 않는데도 북슬북슬 윤기 나는 붉은 털 그리고


정수리에 달린 열쇠고리


레서판다는 당당한 걸음으로 휘적휘적, 계단실로 향했다. 그는 결코 나란히 걷는 법이 없다. 나는 앞서 가는 이의 둥실한 뒤통수만 믿고 간다. 나는

이따금 살고 싶다. 계단실까지 걷는 동안에는 오로지 계단실까지 가는 일만 상상하면 된다. 이 아파트의 계단실 초입은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있으며 레서판다는 서슴없이 오른쪽의 문을 밀어서 연다. “자, 여기서부터가 기절의 계단이네.” 그가 말했다. 기절의 계단? 그게 이름이에요? 그래, 이런 날 미처 새 옷을 장만 못한 사람들은 이걸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오른쪽 문을 밀어서 연 그곳은 아파트의 시멘트 외벽과 내벽 사이에 생긴 빈 공간이었으며, 벽을 따라 위로 삐뚤빼뚤 좁은 계단이 나 있었다. 이런 곳으로도 사람이 다니나. 측량실수 같은 틈새에 계단을 놓다니, 이름을 붙였다니, 단지

시멘트로 채우지 않았을 뿐 아닌가.


뭐.. 가시죠.


창문도 전등도 없는데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땅바닥부터 지그재그 비탈길로 이어진 계단은 한 층에 꼭 12개씩 되었으며 머리가 닿을 듯이 낮은 천장에 자꾸만 스치는 이것은


종유석?

혹은

자투리 시간

뭐 그런 건가.


시간이 남아돌면 꼭 탈이 난다니까.


기절의 계단을 오르면서는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종유석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비껴가는 방법을 알면 다니기에 수월하겠다. 나보다도 키가 작은 레서판다는 머리를 부딪히는 일도 없이 계단을 휙휙 오른다. 점점 가빠지는 레서판다의 숨소리. 아저씨, 업어줄까요? 아니, 괜찮다네. 오르는 길목의 층계참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올라가는 중이거나 올라가는 중이었던 사람들을 보았다. 올라가는 중이었던 사람들은 도중에 멈춘 이들까지도 포함한다. 그들은 앉아 있거나, 짜장면을 먹거나,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중에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곳이 금연구역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웅성대는 소리가 없다는 지점에서 나는 야박함을 느낀다. 나는 이따금 죽고 싶다. 벽과 벽 사이의 공간에서 앉아 있거나, 짜장면을 먹거나,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 아파트는 커다란 꼬북칩 같은 구조였구나.


벽과 벽 사이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잠깐


졸기도 했지만


이내 맨 꼭대기층에 도착한다. 나는 모형 돌다리를 살펴보러 이곳에 왔다. 아치모양의 모형 돌다리는 이 아파트의 문화재로서 한 번씩 금이 가는 수가 있으므로 주기적으로 경과를 돌보고 때우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온 사람들은 과연 말끔한 차림새로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으니 바로 시작하시죠. 나는 꼭 내 몸집 만한 돌다리를 감싼 파란 방수포 위에 올라탄다. 몸을 밀착시키는 것은 작업에 집중하기 위한 자세로서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방수포의 윗부분을 조금 까서, 돋보기로 살펴보고, 그 밑에까지 조금 더, 그다음에도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들추면서 한 군데씩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찾았다!


돌다리 맨 윗부분의 하중이 실리는 부분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돌다리의 이 부분에 금이 가 있기 때문에, 매번 시간약속을 못 지키고, 숨이 모자라며, 불 켜진 방 안에서 인기척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검수 완료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려다,


그런데요

제가 아까 1층에다 할 말을 두고 왔거든요. 아저씨도 다 봤으면서. 아까 그 계시판, 이상하지 않았어요?


라고 덧붙인다.


계시판에는 맨눈으로 봐도 보이는 오타들이 있었으며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꾹 참았던가 혹은 너무나도 뻔뻔한 자태에 도리어 확신이 들지 않아 여태 속으로만 생각해 온 것이다. 모든 뻔뻔한 것들은 그럴싸하다. 그럴싸한 것들이 뻔뻔한 탓도 있고…. 레서판다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읊조린다. 젠장! 그 인간들, 또 속을 뻔했네… 근데 어떻게 한 거지? 그의 맞장구에 나는 기세등등하여 따지러 갈 채비를 한다. 근데, 정말 어떻게 한 거지?


그리하여

비탈길로 된

계단을 내려오면서

깨우친, 나와 레서판다와

벽과 벽 사이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알았어야 할 이 세상의 룰:


글자를

한번 틀리게 적으면 실수가 두 번 틀리게 적으면 의도가 세 번 틀리게 적으면


멋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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