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통역장교 수기 : 08 군인화단계(6) 야전교육대

바이킹 구보와 한강철교

by 김새벽

0. 그건 무슨 계급장인가요?


화생방의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그 다음날은 우리는 진해 외곽 웅동에 있는 해군 야전교육대로 이동했다. 왠지 집을 떠나는 느낌이라 조금의 긴장감과 설레임이 동시에 있었는데 야교대 생활은 꽤 빡세다고 알려져있기 때문이었다. 이름대로 야교대는 유격이나 사격 등 '군인'으로서 기본이 되는 야전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유격이나 각개침투 같은 야전과목들은 그 다음주에 포항에 가서 해병대에서 받을 예정이었기에 야교대에서는 수목금 3일 동안 사격만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교대 생활이 쉬울 것은 아니었다. 이 때가 (가입소 포함) 훈련 4주차 중반이었고 어느 정도 체력들도 올라왔고 생활에 익숙해져 하고 있을 때라 한층 훈련 강도를 올리기가 딱 좋은 때였기 때문이다.


웅동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지금 지도로 찍어보니 30분 거리 뿐이 되지 않는데, 그 때는 몇시간은 간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버스에 실리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내릴 때쯤 눈을 뜨니 심리적으로 어딘가 엄청 멀리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그 때는 부대 밖을 나간다는 것만 알았지 야교대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전혀 알 방법이 없었다. 진해기지를 벗어나서 바깥 풍경이 보이고 민간인들도 보이고 하니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입대하고 거의 한달만에 부대를 벗어나 보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한달이 금방인데 그때는 정말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다 바깥에 나간 것만 같았다. 중간에는 휴게소에도 들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무리 천천히 가도 1시간 정도 거리인데 왜 휴게소에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깥 공기 한 번 쐬라는 배려였을까?) 화장실 다녀와서 버스로 돌아가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붙잡고는 말씀을 거셨다.

"그건 무슨 계급장이에요?"


우리의 벤젠 계급장은 예전에 해군 참위(소위) 계급장 모양이던 속이 빈 육각형에 가운데 가로줄을 그은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게 벤젠의 분자모형이랑 비슷해서 '벤젠'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신기했을 것 같다. 사관학교 장교교육대대 안에서 말고는 볼 일이 없는 계급장이니까.


"해군 사관후보생 계급장입니다."


어르신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계셨지만 밖에서 이야기를 오래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버스로 돌아왔다.



1. 4월이어도 산속은 춥다

도착한 날 오전에는 살짝 비도 오고 흐렸다. 우리는 야교대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려서 걸어서 들어갔는데, 4월이라고 내복 같은 것 없이 홑겹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4월에도 해가 잘 들지 않는 산 속을 생각보다 쌀쌀했다. 거기에다가 가볍게 뿌리는 비가 체감상 더 날이 차게 느끼게 했다. 야상을 꺼내 입은게 야교대 도착한 후였는지 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버스 내려서는 야상을 꺼내 입었던 것 같다. 왜냐면 그때 훈육관님이신 ㅅ소령님이 야상 없이 분명히 추웠을텐데 추운 티를 안 내고 같이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 때문이다. 야상을 입어도 추운데 분명히 엄청 추울텐데 후보생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때는 날이 제법 풀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였는데 갑작스레 추워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어서 널따란 캐노피 지붕 하나만 얹힌, 사방이 트인 야외 구조물에서 사격예비술 훈련을 받았는데, 햇빛이 닿는 곳은 그래도 좀 버틸만 했는데, 그렇지 않은 곳은 야상을 입고 있어도 추웠다. 다들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동기들은 햇볕이 있는 곳으로 몰아두었던 거 같기도 하다. 사격예비술을 시킬 때는 차라리 몸이 움직이니까 덜 추워서 견딜만 했고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추워서 버티기가 힘들었었는데 훈련관님들도 그걸 눈치채고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여주셨다.


야교대는 OCS 뿐만 아니라 해군 수병, 부사관 할 것 없이 모두 거치는 교육장이다. 지금은 야교대도 침상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야교대는 생활관이 침상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장교라고 세병관에서는 4인1실에 침대에서 지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 각 소대별 인원이 다 같이 생활관을 쓰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야교대에서는 며칠뿐이 안 있는 것이라서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미 가까워진 동기들끼리 여럿이 같이 터놓고 지내니 재미있는 점도 있었다.




2. 바이킹 구보

하지만 야교대의 참맛은 조금 열악한 생활관도 생활관이지만 야교대 들어가는 길에 V자로 급경사진 구보 코스와 야교대 어디를 가도 마모가 심해 몹시 거칠어진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거기에다가 야교대에서는 잔뜩 더 군기를 잡는 분위기는 덤. 여기는 도착할 때 부터 세병관에서와는 달리 빡세게 잡겠다는 훈련관님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더더군다나가 여기서도 사격 등 각종 훈련은 장교대 훈련관들이 아닌 야교대 교관들이 진행하는터라 우리 훈련관님들은 우리의 찐빠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V자 경사면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왕복하는 구보를 (찾아보니 한 바퀴 1.8㎞ 정도 코스라고 한다.) 바이킹 구보라고 했는데, 경사가 급하다보니까 자연스레 속도를 유지하더라도 인터벌처럼 되었다. 그야말로 토나오는 코스였는데, 의외로 나는 바이킹 구보는 싫지 않고 재미가 있었다. 물론 힘들기는 아주 힘들었음. 이때 우리 소대장은 찰리였는데 (찰리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찰리는 아주 성실하고 착했지만 리더로서 센스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보할 때 찰리가 소대를 리드해야 하는데 (나 포함) 그 역할을 잘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동기들이 소대장이 안 하고 있는 역할을 채우는 게 많았는데, 우리는 그게 동기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으쌰으쌰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훈육관님이 보시기에 그래도 소대장으로 지정된 동기를 대우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그때 또 혼나기도 했다. 나중에는 사격 후였던가 대기하면서 우리 훈련관님이 우리 중대 인원들을 약간은 게임처럼 경쟁 붙여서 구보 선착순도 시키고 했었는데 몹시 토나올거 같았지만 재미있었다고 기억이 난다. 아무튼 야교대에서의 구보는 힘들기는 해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보다 야교대에서 싫었던 것은 위에서도 이야기한 아스팔트 바닥이었는데, 깐지 수십년 된 것 같은 아스팔트 바닥은 돌들이 노출되어 뾰족뾰족하고 표면이 엄청 거칠었다. 전편에서 이야기한 장교대 세병관 앞의 동편광장에는 이미 손바닥이 적응해서 구부려를 팔딱팔딱 해도 손이 아프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었는데, 여기는 이제는 땅바닥 짚는 것쯤이야 적응했다고 생각해서 자신 있게 엎드렸는데 피부로 전달되는 까슬함이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도착해서 부터 우리는 온갖 트집을 잡혀 얼차려를 받았는데 도착하자마자도 군장과 더플백을 맨채로 구부렸(엎드려 뻗쳐)다가, 한 팔은 소총을 든 채 펼쳐서 하늘로 뻗고 나머지 팔과 다리로 삼각형으로 자세 지탱하며 바들바들 몸을 떨며 버티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여기서는 분위기가 다르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3. 해군 사격은 가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격과 각개침투를 해병대에서 받는 우리에게 야교대에서의 주된 훈련 과목은 사격이었다. 그런데 해군 사격은 그야말로 가라였다. 이건 실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이다. 해군은 이른바 '소병기' 사격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데, 실제로 함정이 주된 전력을 형성하는 해군 입장에서 특수전이나 헌병 같은 특수한 병과가 아닌 이상 '소병기'(소변기 아님)를 다룰 일이란 좀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은 해야 하는데, 아해군은 양성과정에서부터 그 기본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다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3일 동안 3가지 과목을 훈련했는데, 소총 사격 (영점 및 연습사 그리고 측정; 연습사를 했는지도 사실 기억이 가물하다...), 권총 사격 (연습사 및 측정) 수류탄 투척이었다. 수류탄은 연습탄만 던졌다. 250여명이 제한된 시간 내에 과정을 이수해야 하니 모든 게 너무 서둘러서 급하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소총 사격은 영점 사격장에서는 각자 자기 소총으로 사격하고, 실제 사격은 자기 소병기가 아니라 야교대에서 잘 정비해서 비치해둔 소총으로 하였다. 영점사격은 그러면 왜 한 거지? 사실 PRI도 반복해서 뭘 많이 하긴 했지만 인원이 많다고 하여 사격술을 제대로 교육받은 것도 아니었고, 측정사격도 충분히 숙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거리 사격을 경험해본 정도로 진행했다. 이건 총기 친숙화 훈련이지 사격훈련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였다. 우리 소대 훈련관님도 이게 당혹스러우셨는지 "여러분 봐라 이게 아해군의 현실이다."라고 할 정도이니 이 부분은 나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던 것은 아닐 것이다.


권총 사격은 낡디 낡은 45구경 1911을 쏘았는데, 그래도 권총을 쏴본다는 것이 설렜다. 하지만 권총은 정말 맞지 않았다. 권총은 원래 안 맞는 거라고들 하던데, 이건 반만 맞는 이야기다. 권총은 숙달되지 않으면 맞추기 힘들다는 것이 더 맞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사격 역시 권총을 한 번 쏴본다 정도의 체험식으로 진행했다. 물론 오래된 1911 자체가 가늠쇠 가늠자가 낮고 마모되어 잘 안보이는 것도 있긴 한데, 사격간 자세라던지 요령이라던지 이런 교육이 너무 부실했고, 특히 권총 사격은 자세와 파지도 중요한데 너무 옛날 식으로 배운게 지금 생각하면 매우 아쉽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재능인 것인지 잘 쏘는 동기들이 있었다. 권총 사격을 하고는 다른 동기들 마치기를 한참 앉아서 기다렸는데, 야교대 소령님이 마친 사람들 중에서 권총탄 장탄할 사람들을 자원 받았다. 다음 사격할 동기들 탄창에 45구경 권총탄들을 장전해 놓아야 하는데 일손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기도 따분했는데 나와 몇몇 동기들이 벌떡 손을 들었다. 소령님은 입담이 재미난 분이었는데, 본인 실무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인천 근무하는데 데주말에 대기해야 하는데 서울로 점프 뛴 이야기들 등 임관 전 후보생들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썰을 많이 풀어주셨다. 앉아있던 동기들이 갈굼을 당할 때에도 우리는 빗겨 있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수류탄 훈련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우선 그래도 장교 훈련인데 실제 수류탄 던지는 것은 보기만 하고 우리는 연습용 수류탄만 던졌다. 그것도 수십명이 한 사선에 서서 둑 너머로 한번 씩 던져본 것이 전부였는데, 둑 위에 서 있는 교관 맞추는 동기도 있었다... 물론 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워낙 여러명이 던지고 사선 상에 교관이 있다보니 그런 것이지만 여튼 전반적으로 절망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 할 때는 당연히도 무척 긴장하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기수가 유독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고 지금은 달라졌으리라 기대해보지만 이거는 제대로된 훈련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4. 야간 비상소집

하지만 사격 훈련이 가라였던 것과는 달리 털리는 것은 야교대에서의 털림이 한층 빡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교대 도착하자마자 군장에 더플백 매고 한 손으로 총 들고 후들후들거리기도 했고, 바이킹 구보에도 시달리고,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손바닥이 갈려나가고 식당 한번 들어가서 밥 먹기도 쉽지 않고 그랬다.


야교대에서 하이라이트로 야밤에 불려나가서 단체로 또 털렸었는데 (아마 다시 장교대로 돌아가기 전날 밤이었던거 같다) 이때는 정말 쉴새 없이 몰아붙였다. 한번은 다같이 불려나가서 털리는데 그 명목은 우리들 중에 자꾸 나이가 더 많은 동기생한테 형이라고 하는 후보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동기생들 간에는 형, 형 거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래도 유교문화에서 자란 후보생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좀 있는 동기들한테 아무런 호칭 없이 야, 야 거리거나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을 꺼려하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이름 뒤에 형이 아닌 이상한 호칭 같은 것을 붙여 부르곤 했다. 나도 동기들 중에서는 상당히 고령이었는데 다른 동기들이 이름 뒤에 "~찡"이라고 붙여서 불렀다. ~찡이란 호칭은 근데 꼭 형인 사람한테만 붙인 것은 아니었고 나중에는 서로 이름 뒤에 편한 호칭처럼 붙여 불렀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는게 뭔가 마음의 편안함이 있었나 보다.


여튼, 이 와중에 우리 소대 동기들 중에서 나보다도 고령인 형이 있었는데 훈련 중 열외도 많고 성실하지 않아서 동기들에게 인망이 없었다. 이 동기는 형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조심성도 없었는데, 이날 얼차려 받으면서도 자세 똑바로 유지하지 않고 자꾸 흐트러져서 얼차려를 더 세게 받을 빌미를 자꾸 제공하였다. 나는 안그래도 이날 털리는 명목인 '형' 호칭 관련해서 그 동기가 지분이 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차려도 똑바로 받지 않고 자꾸 옆에 피해를 주니까 화가 났다. 그래서 한창 얼차려를 받다가 (한강 철교 하고 있었던 것 같음) 아펭서 또 무너지길래 너무 화가나서 정말 크게 "ㅆㅂㅆㄲ야"라고 외쳤는데 (나는 군대 가기 전에는 욕을 잘 못했음. 내가 욕을 하면 사람들이 웃기다고 했음.) 다행히 훈련관들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털리고 들어왔는데 그 동기형이 나한테 오더니 생글거리면서 "와 새벽아 너 욕도 잘하더라" 이래서 두배로 화가 났는데 뭘 어쩔 수는 없었다.


이건 또 여담인데, 그날 한강철교를 하고 있는데 이게 위치나 자세에 따라서 무게가 집중되면 진짜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 한명 무너지면 줄줄이 무너지고 더 큰 갈굼을 받으므로 어떻게든 버티는게 중요했는데, 그날 우리 소대에 '찰리'가 정말 자세 흐트러짐 없이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찰리는 교대를 졸업하고 선생님 되기 전에 입대한 동기였다. 엄청 깡 마르고, 착한 동기였는데 그는 밀덕이기도 했었어서 초반에 좌학이나 교육 시간에 (외부)교관들의 질문에 답을 아주 잘했고 상으로 초콜렛 같은 것을 나눠줄 때 거의 독식하다시피했다. 그래서 초콜렛 공장이라고 해서 '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찰리는 성실하고 착해서 초반에는 동기들에게 신망을 얻었는데,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뒤로 갈수록 주변을 고생시키는 편이었어서 나중에는 민심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그날 만큼은 그도 우리와 같이 고통스러웠을텐데 정말 자세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다가 본인이 한계에 다달았는데도 아주 큰 소리로 "고통스럽다"라고 외치면서 끝가지 버티는 것을 보고 나는 조금 경외감이 들었다. 체지방이 적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훈련 막바지에 선명하던 찰리의 복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5. 그래도 부대 밖은 설레


털리기도 많이 털렸지만 야교대에서 같이 다 트여있는 생활관 쓰면서 동기들과도 더 친해졌었고 부대 벗어나서 콧바람이라도 쐰 것은 역시 좋았다. 그렇게 다시 장교대로 돌아오니 진짜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4인1실에 침대까지 있는 우리 방이 정말 호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다음주에는 우리는 또 부대를 떠나서 포항으로 향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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