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배신한 그를 조금은 원망하여
사회적인 공적과 사회적인 과오는 그 경중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공적과 개인적인 과오는 서로 비교할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이 쌓아온 사회적 공적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적인 과오를 덮어줄 수 없다.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는 어떤 이의 개인적 덕성을 이유로 사회적 과오를 덮어줄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이의 경우에는 미시적 권력관계에서 오는 수많은 개인적 과오들의 피해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 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는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개인적 과오'로 치부되던 별것 아닌 것 같은 일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더 이상 쉽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데 있어서 '사회적 공적'이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평생 쌓아온 사회적 공적에 전면으로 반하는 '개인적 과오'을 저질렀다는 것은 쉽게 화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 뿐 아니라, 그가 크게 기여한 바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의 권리 보호의 확대를 위한 노력을 크게 훼손하였다.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라도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자제심. 너를 밟고서까지 내가 일어서지는 않겠다는 연대감. 그것이 그가 실현하려했던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단초였다고 나는 이해해 왔다. 비록 행정가 또는 시장으로서 그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은 내가 아는 것들의 범위를 벗어나 있지만, 서로 해치지 않는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구 만큼은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가 조금은 서로에게 덜 각박한 어떤 공동체를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가장 주변의, 가장 취약한 대상을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자신과의 사이의 미시적 권력관계를 남용해서 착취했다는 정황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이것이 그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행위와는 무게감이 다른 이유이고, 그가 진실을 밝히고 처벌 받기 보다는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더 이상 속으로 혼자서 정당화하며 지나갈 수 없고, 어떻게든 대면하여 솔직하게 시인해야 하는 이 현실의 간극을 메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다분히 이해타산적인 입장에서, 사리분별이 없지 않을 사람이, 밝혀지면 죽음을 택할 정도의 일이란 것을 자각했을 것임이 틀림없음에도, 너무나 안이하게도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행위의 개연성에 대한 논평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우린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관대하지만, 자신만은 예외라는, 자신의 행위는 특별하다는 그 착각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고립되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자아는 어쩌면 그러 위험에 더 취약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나는 우선은 화가 많이 났다. 나는 특별히 그의 지지자도 아니었으면서도 그가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순수함에 대한 동경이 있었나 보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므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은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결코 작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그에게 느꼈던 어떤 혐오의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그래도 한 때 그가 지녔던 어떤 상징의 소멸에 대하여는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그 상징은 그 자신의 손으로 죽였음을 마찬가지로 인지하면서.
이러한 나의 태도도 모순적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혼란스런 마음은 내적 모순을 피할 만큼 세련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의 시간'이었던 시대가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야만의 시대'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잠깐이나마 빛났던 어떤 의미들에 의해서 그 이면의 어두움들이 없었던 것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
고인을 보내는 우리의 예의는 침묵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 바랐던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써 진정으로 고인의 ‘뜻’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후회할 오늘의 말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