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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Oct 03. 2022

기후한잔 : 누군가에게는 이념  

그럼에도 과학

어떤 선택의 좋고 나쁨은 당연하게도 당사자 간에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사실 당연할 것은 없는데, 대체로 그렇다. 이것을 타인이 대신해주기 시작하면 개인의 기호란 것은 사라지게 되고, 개인으로서는 자신에게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선택들을 할 기회들을 박탈당하는 일이 된다. 


개인과 개인 간의 선택에 있어서 좋고 나쁨에 제3자가 개입하게 될 때, 이데올로기가 시작된다. 그것이 권위를 갖추고 체계를 갖추면 하나의 지속성을 가진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나쁜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의 합리성으로만 담보할 수 없던 다수의 다수를 위한 응집력을 가지고 달성할 수 없던 목표들을 달성하게 해주는 사례들을 역사적으로 목도해왔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우리는 제3자적 권위의 개입 없이 당사자가 스스로 좋고 나쁨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것이 개인 스스로 자신에게 충만한 삶을 설계해 나갈 수 있는 개연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이것조차도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수 있지만, 잠깐 그 논의를 제하고자 한다.) 


'기후위기'라는 테마 역시도 당연하게도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진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같이 이 역시 개인의 선택에 개인 외적인 (공적인) 의미를 부과하고 따라서 그에 따라 개인의 선택의 좋고 나쁨을 외부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우리는 가능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서 이러한 '억압'의 영역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점에서 '기후위기'가 새로운 세대의 거시적 담론으로서 '억압'이 또 다른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 아닌지에 대한 거부감과 반동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또 어떠한 사고와 논의의 흐림이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지니게 되는 순간, 더 이상 그에 대하여 체계 외적인 합리적인 반론 조차도 억제하는 속성을 지님 역시 우리는 경계해야 하는 바이다. 


거대한 거시적 담론은 언제나 위험성을 가진다. 개인의 자유의 영역을 축소할 수 밖에 없는 공적인 논의들이 과장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려로써 모든 공적인 논의를 무위로 돌려서야 곤란하다. 특히 과학을 과학으로 논박하지 않고, 그 과학이 촉발된 어떤 이념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과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이념이 과학적 논의에서 출발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급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 논의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모든 이데올로기와 같이 환원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잉에 대한 경계가 이 논의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10년 전의 위기의 경험조차 가물가물해하는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두, 세 세대 뒤의 일에 대한 대비를 논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된다. 심지어 그런 단위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촘촘히 얽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실을 조합해서 해석하고 사후적으로 유리한 논리만을 구성하는 것이 우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어른들의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 모든 물타기와 노이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전선에서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다.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과학의 부정확함을 가지고 이 논의 자체를 폐기하려 하거나, 산업적 전환을 통해서 이익이나 보려고 하는 악랄한 자본가들의 음모 따위로 논의의 초점을 흐리는 세력들마저 신실하게 그 옮음에 대하여 믿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들이 누리고 살 2,30년의 시간 동안에는 자본만 많이 축적하면 되었지 나머지야 어떻게 되던 말던의 시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 논의가 이념의 리트머스가 되지 않고, 어른다운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것은 결국 (정치와 시장에서의) 세력 싸움이 되고 말 것이다. 


이미 시장은 어느 정도 이쪽으로 기울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치가 여기에 저항할 힘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전환이 두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공포의 장사를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을 조율하기 위하여 엎치락 뒤치락 하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허여된 행동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나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과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는 그저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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