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세계 평화를 위한 위대한 일만 샘한테 말하고, 나머지는 전부 경찰에 신고해!”
교직에 있는 지인이 한 말이다. 중학교 1학년을 담임하는데, 학생들이 하루가 멀게 싸우고 고자질하고 징징대는 소리를 해대는데 질려 내뱉은 말이란다. 이 말 이후 학생들 간에 뭔 일만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됐단다. 지인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씁쓸하게 말했다. “교직이 성직(聖職)인 줄 알았는데 이건 매일….”
누구나 이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실과 부딪혀보면 그 이상을 견지하기가 생각보다 힘들다는 걸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상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사진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고 읽는다.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다, 란 뜻이다. 용수(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비능발고 자능여락(悲能拔苦 慈能與樂)”의 줄임말이다. 어느 한의원 벽에 걸려있는 걸 찍었는데 의술을 불 · 보살의 자비심에 견줘 생각하라는(한다는) 의미로 써 놓은 듯했다.
한의사의 이상은 무엇일까?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한의사의 현실은 어떠할까? 한의사라는 것도 먹고살기 위한 직업의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의사들이 이상만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은 자명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인 한의사가 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의사로서의 이상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은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여 보는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고 상보적인 것으로 본다면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비루(鄙陋)한 말과 행동을 상대하는 것이 성직으로서의 교직을 완성하는 숫돌이라 여기고, 직업인으로서 베푸는 의술을 인술로서의 의술을 완성하는 숫돌로 여긴다면 괴로움이 줄거나 없지 않을까 싶다.
사진의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拔은 扌(손 수)와 犮(달릴 발)의 합자이다. 뽑아낸다는 뜻이다. 扌로 뜻을 표현했다. 犮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뽑는다는 것은 달려가듯이 빠르게 돌출시키는 행동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뽑을 발. 拔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選拔(선발), 拔群(발군) 등을 들 수 있겠다.
苦는 艹(풀 초)와 古(옛 고)의 합자이다. 도꼬마리(약재의 일종)란 뜻이다. 艹로 뜻을 표현했다. 古는 음을 담당한다. 쓰다, 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쓸 고. 苦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甘呑苦吐(감탄고토), 苦衷(고충) 등을 들 수 있겠다.
與는 두 사람이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더불 여. 줄 여. 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授與(수여), 參與(참여) 등을 들 수 있겠다.
樂은 거치대 위에 올려놓은 큰 북과 작은북을 그린 것이다. 혹은 금슬(琴瑟)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음악이란 뜻이다. 음악 악. 즐겁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즐거울 락. 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音樂(음악), 快樂(쾌락) 등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올해 목표가 ‘어깨 펴기’이다. 아내한테 어깨가 굽어서 보기 싫다는 핀잔을 자주 들어서 올해 목표를 이것으로 정했다. 그런데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선생이 지은 초등학습서)』의 첫 장을 읽다 내 자신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학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맨 먼저 뜻부터 세워야 한다. 그리해서 자기도 ‘성인(聖人)’이 되리라고 마음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조금이라도 자기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물러서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학문(삶)의 목표를 ‘성인’에 두는 사람은 한 해의 목표를 결코 ‘어깨 펴기’ 같은 소소한데 두지 않을 것이다. 한 해의 목표를 ‘어깨 펴기’에 둔다는 자체가 삶의 목표가 없거나 있다 해도 비루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의 관계를 상보적 관점으로 헤아리니 한심하다는 부담을 조금 덜게 됐다. 삶의 목표가 비루하거나 없다 해도 현재 하려는 나의 일이 개선(改善)의 방향을 띈 것이라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율곡 선생님도 나의 이런 생각을 가상하게 여겨주시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