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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Dec 13. 2021

잠에서 깨다

서거정(徐居正, 1420 - 1488)의 「수기(睡起)」

   

발 그림자 길고                           簾影深深轉 염영심심전   

연꽃향기 은은타                         荷香續續來 하향속속래  

혼곤히 꿈속 헤매는데                  夢回孤枕上 몽회고침상   

요란한 빗소리 오동잎에 듣다        桐葉雨聲催 동엽우성최

徐居正, 1420 - 1488)의 「수기(睡起)」

     

긴 여름날 오후 잠시 낮잠에 들었다 깼다. 기분이 어떨까? 개운하지 않을까? 이 시는 이 개운한 느낌을 표현한 시이다. 그런데 그 느낌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표현한 것일까?      


시인은 우선 낮잠 드는 상황을 그렸다. 발 그림자 길게 드리웠다는 첫 구는 지리한 여름날 오후 장면을 그린 것으로, 낮잠 들기 쉬운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한 낮도 낮잠 들기 좋은 상황이지만, 여름날은 길기에, 발 그림자 길게 드리운 오후도 낮잠 들기 좋은 상황이다. 한낮의 낮잠을 굳이 피했다면 더더욱 잠들기 좋은 상황이다.      


둘째 구에서는 첫 구의 내용을 심화시켰다. 혼곤한 시점에 맡는 미풍에 실려오는 은은한 연꽃 향기, 최면제에 다름 아닐 터이다.   

   

드디어 잠이 들었다. 셋째 구의 ‘회(回)’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글자다. 흔히 이 글자를 ‘깨다’로 많이 번역하는데, 이도 좋지만 꿈속의 상태를 나타낸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그래서 위 번역에서도 '헤매는데'로 번역했다). 시제(詩題)인 '수기(睡起)'의 '수(睡, 잠자다)'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마지막 구절. 잠에서 깬 개운한 상태를 그렸는데, 첫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다만 오동 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만 그렸다. 넓은 오동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라니, 지리한 여름날의 노곤함과 지리함을 한꺼번에 날리지 않는가! 시인은 잠에서 확연히 깬 것이고, 그때의 느낌은 노곤함과 지리함을 날려버린 그야말로 ‘개운함’ 그 자체인 것이다!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말한 것이다. 


노련미가 돋보이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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