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검(金克儉, 1439-1499)의 「규정(閨情)」
아직 한겨울 옷 못 보내 未授三冬服 미수삼동복
한밤중 다듬이질 空催半夜砧 공최야반침
제 마음 아실까요? 銀釭還似妾 은강환사첩
기름 다해 심지만 타는 등불 淚盡各燒心 누진각소심
슬픔이 자글자글한 시이다. 그런데 정작 슬프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인은 어떤 장치를 통해 슬픔을 표현했을까?
1구의 삼동(三冬)과 2구의 반야(半夜)는 검은 색감이다. 3구의 은강(銀釭)과 4구의 루(淚)는 하얀 색감이다. 검은 색감과 하얀 색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죽음 혹은 슬픔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들 색감을 통해 시적 화자의 슬픈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아울러 색감의 대상 규모를 점차 압축시켜 슬픔의 농도를 짙게 만들었다.
슬픔의 색감들은 정적이다. 시인은 여기에 동적인 시어를 곁들여 슬픔의 상황을 빈틈없이 조성했다. 1구의 미(未), 2구의 공(空), 3구의 환(還), 4구의 각(各)은 슬픔에 기인한 불안정한 상황을 나타낸 시어이다. 나아가 시인은 이들 시어를, 색감의 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심화(미, 공) 반복(환, 각)을 통해 그 농도를 짙게 만들었다.
색감과 동정으로 표현된 배경 위에 시인은 마침내 비유의 대상을 얹어 슬픔의 정점을 찍었다. 더 이상 태울 기름이 남지 않아 심지가 타들어가는 등잔불을 통해 이제는 눈물조차 말라버린 시적 화자의 애끓는 마음을 적실히 표현한 것.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게 지은 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