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 잘하고 애써 좋은 표정 짓는 사람에게 인(仁)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이다. 그는 인을 설명할 때, 부처처럼, 방편 설법을 사용한다. 상대에 맞춰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위의 말도 분명 누군가와 대화하며 나온 말일 것이다. 아마도 상대의 과도한 립 서비스에 경각심을 주려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공자가 생각한 인에 과도한 립 서비스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 여기 교언영색이란 의미를 포장이란 의미로 환치하고 인이란 의미를 진실이란 의미로 환치하여 이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위 말은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포장이 많을수록 진실과 멀어진다! 포장은 물건에도 사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니, 위 말을 한 번 더 환치하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진실한 사람은 숨기고 꾸미지 않고, 좋은 물건은 포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치관이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포장을 경계하는 공자의 저 말은, 크게 보면,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 상업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는 저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상업에서 포장이란 불가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만약 상업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교언영색 의어인(巧言令色 宜於仁). 말 잘하고 애써 좋은 표정 짓는 것은 인에 합당한 태도이다. 상업이란 모름지기 타인의 마음을 훔쳐야 가능한 것이니 상대를 배려해 좋게 말하고 좋은 표정 짓는 것은 권장될 일이지 터부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의 한자는 ‘과실대(果實袋)’라고 읽는다. 과일 포장지란 뜻이다. 과일의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지를 씌운 이유는 뭘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값을 더 받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포장지를 씌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확실히 포장은 상업과 관련된 것이다. 농업에 기반한 문화에서는 포장이 발달할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포장이란 기피 혹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목하 우리는 상업의 극성,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심지어 생명조차 ―시대에 포장은 필수 불가결이다. 물건도 마찬가지이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포장을 통해 값을 올리려 분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지나치면 아예 안 한 것만도 못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성형을 과도하게 하여 외려 이상한 몰골이 된다던가 겉은 그럴싸한데 속은 썩어있는 과일 상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일시적으론 값이 올랐을 수도 있지만 종내는 원래 값도 못할 수 있다. 무릇 포장이란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야지 빈목(矉目)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어느 대통령 후보의 부인 논란은 과도한 포장이 빚은 문제이다. 화룡점정을 하려다 빈목이 된 사례라 하겠다. 확실히 포장은 적당할 때 의미가 있지, 과도할 때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공자의 말을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말이라고 비판 비슷하게 언급했지만, 사실 공자의 말은 상업의 극성 자본주의 시대 포장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공자의 말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해석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적당히 포장해라!
(공자는 교언영색에 인이 없다고는 안 했다. 인과 멀어질 수 있다고 경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교언영색, 즉 포장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과유불급한 포장을 말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