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죽을 둥 살 둥 공부하는데, 정작 시험 문제는….”
기말고사 원안 제출 마감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앞자리 동료에게 말꼬리를 흐리며 약간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학생들이 전투에 임한 것처럼 공부하는 것에 비해, 출제에 임하는 우리는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출제에 임하는 것 같지 않다는 약간 자조적인 말이었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저는 아무래도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겨우 마감을 지킬 듯싶네요.” 동료가 맥없이 웃으며 화답했다.
누군들 좋은 문제를 내고 싶지 않으랴. 그러나 수업하고 공문 처리하고 방과 후 수업하고 상담하고 개인사 처리하다 보면 그런 희망은 늘 희망으로 끝나고 만다. 동료의 말처럼 마감 시한 지키기에 급급하다. 때론 야근까지 해가며. 간혹 특출한 동료들이 있기는 하다. 문제 은행처럼 사전에 조금씩 문제를 만들어 놓았다가 이를 정리하여 제출하는 것. 그러나 역시 특출한 사례이지 일반화된 사례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시험 공화국이다. 그런데 정작 그 시험 출제는 의외로 허술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리한 추론이란 것 잘 안다. 너무 꾸짖지 마시라.) 수능 출제만 해도 단기간에 출제한다. 아무리 고수들만 모였다 해도 근원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수능시험 후 잡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학생들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수능 출제도 이런데, 다른 시험들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것 같지 않다. 기간을 늘리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도 해법은 아닌 것 같다. 본질적으로, 출제하는 이들이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만큼 비상한 마음 자세가 아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무리한 추측이란 것 잘 안다. 너무 꾸짖지 마시라.)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시험 문제 그 자체의 의미인 것 같다. 제아무리 정교한 문제를 낸다 해도 그 문제 자체가 유의미하지 않다면 그 시험 문제는 무가치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사진은 과거 시험에 탈락한 어느 응시자의 답안지이다.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를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병풍을 만드는 밑 종이로 사용된 것이라 한다. 왕실의 물건을 만드는데 재활용품을 썼다는 게 특이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문제에 대한 답안 일까도 궁금해진다.
“선왕(宣王)에게 받은 것이 아니요 문조(文祖, 선왕의 조상인 문왕)에게 받은 것이니, 선왕이 명한 것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문조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고, 선조를 공경하는 뜻을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강한(江漢, 시경의 한 장)’의 뜻을 살펴본다면 그 의미를 판별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대목의 주(周)는 기주(岐周)를 말하며 명(命)은 명한 바란 뜻이니 선왕이 소호(召虎, 선왕의 부하)에게 명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주수명(于周受命)’의 의미는 감히 자신이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 회남(淮南)의 오랑캐들이 오랫동안 왕실의 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성세(聖世)에 마땅히 정벌해야 할 것이나 소호의 굳셈이 아니었다면 그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문묘(文廟, 문왕의 사당)에서 내려준 것이 아니었다면 감히 그 명을 거절하고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저 고인의 말에 “책명(策命)이란 수명(受命)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란 것이 있으니, 수명을 이른다는 것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부자(朱夫子, 주희)와 채서산(蔡西山, 채원정)이 책명의 뜻을 논한 것과 정부자(程夫子, 정호와 정이)와 사상채(謝上蔡, 사량좌)가 선조를 공경하는 도에 대해 강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강론들은 경전의 대지(大旨)를 깊이 얻었으니, 수명의 도에 대해 후세대에 길이 밝혀 놓았다 하겠습니다. 무릇 옛 군자로서 선조를 공경하는데 뜻이 있다면 바야흐로 어찌….”
非維受於宣王也 卽受於文祖也 宣王所命 非維出於其躬也 卽出於文祖也 此非不自專之意乎 亦豈非敬先之義乎 執此以究江漢之旨 不難卞矣 盖周者 歧周也 命者 所命也 宣王命召虎必也 于周受命者 此不敢自專之義也 嗚呼 淮南夷之久不從命 聖世之所當征討也 而非召虎之㤠則不堪當其任也 非文廟之下 則不堪擅其命而受之也 大抵古人有言曰 策命豈非受命謂耶 受命之謂於是見之矣 是知朱夫子與蔡西山論策命之義 程夫子與謝上蔡講敬先之道 盖其講論之意 深得乎葩經之旨 而受命之道 闡發於千載之下矣 凡厥古之君子 有志於敬先 方盍
답안의 내용은 시경 ‘강한’ 장의 의미를 풀이한 것으로, 특별히 ‘우주수명’의 의미를 상세히 풀이하고 있다. ‘강한’은 주나라의 중흥주인 선왕이 소호에게 회수 지역의 오랑캐를 정벌케 한 것과 그 달성한 공훈을 기린 내용이다. 답안 작성자는 자의(字義) 설명과 함께 선왕(先王)에 대한 존중이란 관점으로 ‘우주수명’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시제(試題)는 ‘우주수명’이었다.
유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시대의 문제이니 유학 경전의 뜻을 묻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거 시험이란 백성을 다스릴 관리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문제인데, 그 능력 여부를 판가름할 문제를 내지 않고 경전의 의미 해석을 묻고 있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리가 경전의 의미를 알면 좋겠지만 그것이 관리의 실무 능력과 얼마나 함수관계를 가지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 이 시험 문제를 그저 시험 그 자체를 위한 문제였다고 말하면, 지나친 혹평일까? 과거제는 분명 신선한 선발제였을 것이다.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시험만 통과하면 관리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신선한 선발제인가. 그러나 그 선발을 위한 문제는 거기에 필적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험도 저 과거제 시험과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식이 촌각을 다투며 무한대로 증폭되는 시대에 철 지난 지식을 평가해야 하는, 더구나 그것을 가지고 서열을 매기는, 학교 시험이나 입시 시험은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공들여 좋은 문제를 낸다 해도 그것은 시체를 미용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좋은 문제는 그것이 유의미한 시험일 때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무의미한 시험일 때는 제 아무리 정교한 문제라 해도 무의미하다 하겠다.
의미를 지니는 좋은 문제를 낼 수 있는 시험 제도를 갖추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할 것 같다. 물론 시험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바람직한 것은 시험 그 자체가 의미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 아닐까? 시험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관문인데, 굳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면 시험과 시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시험은 주로 입시 시험, 중에서도 지필시험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사람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시험이 필요하다. 시험이 불필요한 사회라는 것은 지금과 같이 무의미한 지식의 테스트를 통해 서열을 매기는 풍토가 사라진 사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 글을 읽고 교사들이 시험 문제 작성에 태만한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염려 붙들어 매두시라. 다들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