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오래전 한 불교 단체에서 주최하는 심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주관하는 스님이 프로그램 진행 기간 동안 마음에 새겨야 할 문구가 있다며 저 글귀를 소개했다. 이른바 화두였다. 프로그램이 끝나는 날, 주관했던 스님이 참가자들에게 화두에 대한 답을 내놔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답을 내놓았다. ‘나는 너다.’ 스님은 답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웃기만 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동안 내가 답했던 말을 되새기며 이를 실천에 옮겨보려 노력했다. 타인의 그릇된 행동을 보면 욕하기에 앞서 나의 그릇된 행동을 타인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가엾게 보려 했고, 타인의 좋은 행동을 보면 시기하기에 앞서 나의 선한 면모를 타인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사랑스럽게 보려 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얼마 안가 전처럼 다시 타인의 그릇된 행동을 보면 욕이 먼저 나왔고, 타인의 좋은 행동을 보면 괜한 시기심이 먼저 일었다. 관성은 힘이 셌다.
사진은 ‘백화춘도위수향(百花春到爲誰香)’이라고 읽는다. ‘온갖 꽃 봄이 오면 뉘를 위해 향기를 뿜나?’란 뜻이다. 송대의 선승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선시 중 한 구절이다. 원시에서는 ‘백화춘지위수개(百花春至爲誰開, 온갖 꽃 봄이 이르니 뉘를 위해 피는가?)’라고 쓰고 있다. 낙관에 해당하는 한자는 만공(滿空)으로, 만공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불교를 지키고 유신시키려 애썼던 선승이다. 설두중현의 위 문구를 좋아해 서예 작품으로 남긴 것이 있다. 그런데 사진의 글씨는 만공 선사의 글씨가 아니다. 그저 만공 선사가 쓴 것처럼 흉내 낸 것일 뿐이다(사진은 한 버스 정류장에서 찍었다).
‘온갖 꽃 봄이 오면 뉘를 위해 향기를 뿜나?’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화두이다. 화두는 끝 모를 심연(深淵)의 질문과 같기에 그에 대한 답도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그 각양각색의 답이 다 맞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 답을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했거나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했거나 말이다. 화두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의 근기(根機)와 삶의 이력(履歷)에서 나오기에 저마다의 답이 정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두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 답을 삶을 견인하는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그 자신 타인을 위해 향기를 뿜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고,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그 자신 자신의 삶을 충실히 가꾸는 게 중요하다. 이를 그럴듯한 말로 바꾸면, ‘돈오(頓悟)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점수(漸修)가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고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점수가 부족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심성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스님이 지은 미소의 의미를 생각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그 의미가 약간 어슴푸레하게나마 이해된다. 그건 이런 의미 아니었을까 싶다.
“하하, 나도 그 정답을 모릅니다. 그러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요. 그러나 중요한 건 깨닫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말해 봤자 별 소용없어요. 본인이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