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저 꽃과 /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 한 대목이다. 삶과 죽음을 같이 보고 있지만, 죽음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삶이란 칼 위에서 춤추는 격인데 왜 그리 삶에 열중하냐며 삶에 목매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윤심덕은 꽃다운 목숨을 현해탄에 던졌다(이설(異說)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설을 따랐다).
사진의 한문은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춘효(春曉, 봄 새벽)」란 시이다(사진은 한 음식점에서 찍었다).
봄 잠이라 노곤해 새벽 온 줄 몰랐더니 / 곳곳의 새소리 늦잠을 깨우네 / 밤사이 비바람 거셌거니 / 아, 꽃잎은 얼마나 졌을까 春眠不覺曉 處處聞鳥啼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봄날의 정감을 시각이 아닌 청각을 통해 묘사한 점이 돋보이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를 봄날의 정감을 그린 것이 아닌 다른 각도로 볼 수는 없을까?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우회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2구는 삶, 3·4구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그린 것으로 보는 것. 이 시를 「사의 찬미」와 견줘보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지만, 삶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거센 비바람에 맥없이 떨어졌을 꽃잎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삶에 우선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역으로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맹호연은 비록 출사하여 부귀공명을 누리진 못했으나 녹문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삶은 죽음의 이면이고, 죽음은 삶의 이면이다. 어느 한쪽을 경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둘 모두를 고르게 바라보고 대해야 한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며 삶을 경시하는 건 자포자기의 태도이고, 삶이 최고라며 죽음을 터부시 하는 건 과대망상의 태도이다(맹호연은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지만 터부시하고 있지는 않다). 과거 인도에선 자녀들을 성가(成家)시킨 뒤 출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출가란 이해타산의 삶을 벗어나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을 떠나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옛 인도의 출가 풍습은 삶과 죽음을 고르게 대한 고귀한 풍습이었다란 생각이 든다.
인생 백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에 맞춰 노인을 위한 각종 복지제도가 마련되고 있다. 좋다. 그러나 이런 제도에 앞서, 나이 드는 이들 스스로의 자기 검속(檢束)도 필요할 듯싶다. 삶과 죽음을 고르게 바라보고 출가의 심정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것, 이런 자기 검속이 있을 때 복지도 더 의미 있게 누리지 않을까 싶다.
여담. 사진의 한시에서 ‘조제(鳥啼)’는 ‘제조(啼鳥)’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운이 맞는다. 원시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글씨 쓰신 분이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