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도보 국토 종단기 제2화
3월 31일 금요일
5시에 일어났다. 평소 집에서는 4시에 일어나는데, 늦게 일어난 편이다. 어제 일정은 차 탄 것이 거의 전부인데, 은근 피곤했던가 보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땅끝마을에서 남창까지 '길찾기'를 검색해 보니, 22km에 도보로 5시간 54분 걸린다고 나온다. 첫날부터 많이 걷는 것은 무리. 적당한 거리와 시간 같다.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여 6시 40분에 모텔을 나섰다. 길치라, 어떻게 경로를 잡아야 하는지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살펴봤다. 친절하게 안내가 나오는데, 이상하게 방향을 잘 잡지 못하겠다. 서너 번 헤매다 겨우 방향을 잡았다. 지나오면서 뒤돌아보니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경로인데, 너무 상세하게 안내해 줘, 되려 헤맸던 것 같다. 과도한 친절은 불친절과 매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른 시각이라 공기도 상쾌하고 차량 통행도 적다. 아침 햇살 빛나는 바다를 보며 걸으니 절로 흥이 난다. 시 한 수 읊을 만도 한데, '아, 바다여~' 밖에는 읊을 말이 없다. 애고, 이놈의 퍽퍽한 감성. 이봐, 너무 타박하지 말어. 저 아름다운 풍경이 자네 몸에 알알이 박혀 언젠가는 시가 되어 나올지도 모르니. 좋은 풍경 만났다고 금방 시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지나치게 성급한 겨. 그런가?
벚나무 가로수에 벚꽃이 한창이다. 어제 땅끝 표지석 찾아갈 때는 간간이 꽃망울 터뜨린 것만 보여 만개한 것을 보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차량 통행이 적어 벚꽃 가로수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보았다(이건 처음 공개하는 비밀인데, 스마트폰을 구입한 후 처음으로 셀카를 찍어 보았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건 3년 전이다).
땅끝마을이 점점 멀어져 보일 즈음,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무심히 지나치는 게 서먹하여 기세 좋게(?) 인사를 했더니, "좋은 여행 되세요."라고 화답해 줬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도중(道中)에 고마운 분을 한 분 더 만났다. 소형 트럭을 몰고 가던 분이었는데, 사탕 한 개를 건네주며 힘내라고 했다. 작은 친절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해안도로 걷기를 끝내고 일반 국도로 들어섰다. 길옆 밭에 유채꽃들이 만발했다. 오호라, 너희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잠시 유채꽃밭에 들어가 셀카를 찍었다. 작년 늦가을에 나도 밭에다 유채꽃씨를 뿌렸었다. 그런데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해 그만 싹이 터버렸고, 다시 추워진 날씨에 시들어 죽고 말았다. 유채꽃을 못 보게 된 아쉬운 마음을 여기서 달래 본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관리했기에 이렇게 유채꽃이 만발했지? 여기도 이상 기온을 겪었을 텐데….
남창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조금 욕심을 부려 북일면까지 가기로 했다. 남창을 지나 북평면에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1시가 조금 지나 들어갔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어 살짝 당황했다. 점심 타임이 끝났는데, 눈치 없이 들어왔구나. 홀대받겠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내 뒤로 손님들이 네다섯 명 더 들어왔다. 휴~ 다행. 노인 한 분이 들어서며 짜장면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물은 셀프'라고 쓰여있는 것을 못 보셨는지, 주인장이 물 갖다 주기를 멀뚱멀뚱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물 한 잔을 떠다 드렸다. 약간 어색해하며 고맙다고 하셨다. 이거 내가 괜히 과도한 친절을 베푼 건가? 노인분도 '물은 셀프'라는 걸 알고 계시는데, 괜스레 오지랖 넓게 친절을 베푼 건가? 뭐, 그래도 나쁜 일 한 건 아니니….
점심을 먹고 식당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건물들은 을씨년스럽고 사람들은 노인 일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면서 도로 주변의 폐가도 여러 채 보았다. 출발 즈음의 싱그럽던 풍경과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 똑같은 해남군인데 어찌 이리….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만나는 여러 지역이 대부분 그랬다.)
북일면에서 1박을 해야 하기에 숙박지를 검색했는데, 펜션 하나만 검색되었다. 가격이 비쌀 것 같아 약간 염려하며 전화했는데, 4만 원이란다. 그 정도면 땡큐지~. 펜션을 향해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전화가 왔다. 좀 전에 통화했던 펜션 주인. 방이 없단다. 손님 한 분이 간다고 했다가 다시 묵는다고 했다며, 미안하단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조심해서 오세요~. " 허허, 이거 참. 알겠다고 말하면서 혹시 다른데 묵을 곳이 없냐고 물었더니, 옆 사람과 뭐라고 말하더니, 교회에 한번 물어보라고 한다.
북일면의 얄궂은 펜션 가까이에 도착한 것은 5시 15분. 6시 전에는 숙소를 잡아야 할 텐데, 이를 어쩐다? 펜션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교회가 보인다. 펜션 주인이 말한 교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대가리 도치 삼아 한번 재워달라고 통사정해 보자. 목사님이 길 잃은 어린양을 그냥 내치지는 않으시겠지. 교회에 도착해 목사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초면에 죄송합니다.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 문을 열고 나온 목사님. 인상이 선해 보인다.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1박을 부탁드리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묵고 가라고 허락하셨다. "감사합니다!"
교육관으로 쓰는 곳을 안내해 주며, 전기 난방을 켜준다. 갈 때는 코드를 꼭 빼고 가라며, 이부자리가 없으면 교육관에 있는 이부자리도 쓰란다. 몇 시에 출발할 거냐고 하기에, 보통 4시에 일어나니 늦어도 6시에는 출발할 거라고 답했더니, 깜짝 놀란다. 늦게 출발하면 다음 날(토요일) 교회 행사에 혹 지장을 줄까 봐 걱정하셨던 모양인데, 예상보다 너무 일찍 출발해 놀라신 모양이다.
누룽지와 구운 계란 포도 젤리로 저녁을 때웠다. 씻기가 귀찮아 물수건으로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교육관이라 그런지 여러 서류와 사진 책들이 진열돼 있는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인분들이 전부 노인이었다! 목사님은 무슨 흥으로 목회를 하실까, 별 쓰잘데기 없는 염려를 했다.
가족 단톡방에 2신을 띄우고, 괴괴한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내일은 강진읍까지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