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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May 05. 2023

길에서 길을 묻다

20일 도보 국토 종단기(제11화)

4월 9일 일요일


이리스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무지개는 역시 허망한 것이로다. 눈을 떠 시계를 보니, 5시 반이다. 10분 정도 복식 호흡을 하고 맨손 세수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아침을 먹고, 샤워를 했다. 여타 제반 의식을 치르고 잠시 침대 끝머리에 앉아 있는데, 불현듯 봉지 커피가 먹고 싶어 진다. 어제 남겨 온 탕수육을 먹었기에 속이 약간 느끼해서 그런 것 같다. 갑자기 맹맹이 콧구멍 같은 주인에게 섭섭한 마음이 든다. 아니, 그 봉지 커피 2개(일반적으로 2개를 놓는다) 값이 얼마라고 그걸 구비 안 해 놓고….


6시 30분, 모텔 현관에 섰다. 맹콧 주인은 없고 부인인 듯한 황개(황소개구리) 인상의 아주머니가 서성이고 있다. “일찍 나가시네요?” 인상과 달리 말씨는 상냥하다. “네, 갈 길이 바빠서요.” 하면서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프런트 한쪽에 정수기와 봉지 커피가 눈에 띄었다. 먹고 갈까? 살짝 갈등이 생긴다. 마음을 접었다.


앱을 켜고 무주에서 영동역까지 ‘길찾기’를 누르니, 29km에 도보로 7시간 28분 걸린다고 나온다. 적당한 거리이다. 그렇다면, 머루 와인 동굴을 한 번 찾아가 볼까? 무주에서 와인 동굴까지 ‘길찾기’를 누르니, 7.3km에 도보로 80분 걸린다고 나온다. 멀지 않은 거리이다. 그런데 개장 시간이 10시이다. 8시나 9시 개장이면 한 번 가보겠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다음에! 그럼, 영동역을 향하야, 출발~!


날씨가 더없이 청명하다. 고려 때 시인 정지상은 청명한 하늘을 유리에 비유했는데[天色淨琉璃], 그이가 본 하늘이 바로 저런 하늘 아니었을까? (여기 유리는 지금 우리가 접하는 하얀색의 유리가 아니고, 비취색의 유리이다.) 연신 청명한 하늘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 채 걷는다. 간밤에 만나지 못한 이리스에 대한 아쉬움을 하느님께서 달래주시나 보다. 무주를 벗어나는 걸 알려주는 표상이 서 있다. 그런데, 웬 해태상? 그러고 보니 지난번 작천면에서 본 표상도 해태상이었는데, 혹시? 맞았다! ‘해태 제과’에서 제공한 표상이었다. 그런데 회사명에 검은색을 덧칠해 놓았다. 무슨 사연인고? 공적인 장소를 알리는 곳에 사적인 회사명이 들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가린 것일까? 분명한 건 저 해태상은 지자체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해태 제과에서 기증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기업에서 기증하니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 이름을 가린 것 같다. 아예 상(像)까지 들어내면 좋겠는데, 그건 좀 부담스럽고. 혼자, 멋대로 상상해 본다.

또 만난 해태상. 이젠 반딧불 상으로 해놔야 하지 않을까?


충북 입성을 알리는 입간판을 만난다. 감회가 좀 남다르다. ‘당신, 이제 전남과 전북을 지나 충북에 들어섰소. 축하하오!’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감사합니다! 입간판 아래,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러기 어려운, 구호에 눈길이 간다. “함께 하는 도민 일등 경제 충북.” '함께 하는'은 괜찮은데, '일등 경제'는 눈에 거슬린다. 무릇 구호란 그렇지 못한 현실을 그런 현실로 바꾸기 위해 내거는 법. 일등 경제 충북이란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충북, 꼭 일등을 해야만 되겄어? 그냥 지금도 좋은 것 같은데. 입간판 상단엔 저 거창한 구호의 1/3 정도 크기 글씨로 “아름다운 충북으로 어서 오세요”라고 써놓았는데, 차라리 이 글씨로만 입간판을 해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저 거창한 구호는 기존 어떤 구호 위에 덧붙인 티가 역력하다. 쭈글거리는 것. 영환 씨가 충북도지사가 된 후 새로 내건 구호인 것 같다. (영환 씨라고 하는 것에 반감 갖지 마시라. 영환 씨는 김 씨 항렬 돌림자 사용상 내게 아들뻘이다). 영환 씨, 시인이기도 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구호는 영 아니올씨다네? 시인다운 아름다운 구호로 바꾸던가, 아니면 아예 쓰지 말던가 하시면 안 될까?

성글게 덧붙인 것만큼이나 어색한 느낌을 받았던 구호. 충북, 일등 안 해도 돼! 지금도 좋아! 


별 쓰잘데기 없는 훈수를 두며 걷는데, 하늘을 보니 진짜 너무너무 맑고 푸르다. 연암은 드넓은 평원을 보며 울기 좋은 장소[號哭場]라고 말했다는데, 철학도 표현력도 없는 나는 저 맑디맑은 푸른 하늘을 보니 그저 이 말밖에 안 나온다. 오~메, 미치겄네!

오~메, 미치겄네!


하늘만 맑고 푸른 게 아니다. 물도 맑고 푸르다. ‘봉황 호수’라는 곳을 지나는데 맑고 푸른 하늘이 그대로 물 위로 내려온 듯하다. 주변의 연푸른 신록 우거진 산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보여준다. 풍경화는 역시 자연이 그린 게 최고다!

오~메, 미치겄네!


포도나무 과수원을 지난다. 어, 그러고 보니 영동은 포도로 유명한 곳이잖아? 가지치기를 한 건지 밑둥을 잘라낸 건지 절단된 포도나무를 쌓아놓은 것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게 예술작품이다. 무슨 추상화 한 폭을 보는듯하다. 거, 참, ‘아름다운 충북’이라고 하더니 농부님들이 다 예술가인가 보네. 대단들 허십니다(진심). 재배하는 포도나무들 위에 모두 비닐 차단막을 씌워 놓았다. 이런 건 처음 보았다. 일조량을 조절해 포도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설치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비닐 차단막도 예술적으로 보인다. 거, 참…. 

쌓아 놓은 절단된 포도나무.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학산면내를 통과한다. 길 한쪽에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가 보인다. 팥빙수! 오매, 먹고 싶다. 아녀, 가격이 비쌀텐데, 그렇게 사치스런 음식을 먹으면 여행 취지에 어긋나. 아니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그깟 빙수 하나를 못 사 먹고 그랴. 자신을 위해 그 정도 쓰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두 녀석이 서로 다툰다. 승부는? 뒷 녀석이 이겼다!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가게에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못 됐다. 그래, 이걸로 점심을 대체하자. 팥빙수도 열량이 적지 않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다. 주인에게 팥빙수를 달라니, 작은 걸로 드릴까요, 큰 걸로 드릴까요, 한다. 점심 대용이니 큰 걸로 해야 할 터. 큰 걸로 주세요, 하니 주인이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인다. 얼마냐니, 만 이천 원이란다(작은 것은 칠천 원). 작은 카페인데, 손님이 없다. 주인이(여주인이다) 팥빙수를 내오며 “빙수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한다. 그러면서 너스레를 떤다. “제가 제 입으로 맛있다고 하기는 그렇고, 한 번 드셔 보세요.” 이런, 선입견을 심어 주시네? 선입견을 심어 주는데 어이 반박을 하랴. 두어 입 먹어보고, 일단 “맛있네요.”라고 화답을 해줬다. (그런데 혓바닥이 둔감하고 비교할 만큼 특별한 빙수를 먹어본 적도 없어, 게다가 살짝 배도 고프고 목마른 상태라, 진짜 맛있게 먹었다.) 한 참 먹고 있는데, 여주인이 다가온다. 좀 특별해 보인 손님인 데다 다른 손님도 없어 말 상대를 해주고 싶은가 보다. 얼굴을 보니, 내 연배나 그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인다. 대화하기 좋은 상대이다. “어디 가세요?”를 시작으로 이것저것 서로 말을 섞는데, 귀에 와닿는 말을 한다. 자기 남편도 명예퇴직을 했다는 것. 전직 경찰인데 몇 년 남기지 않고 그것도 자식 혼사를 목전에 두고 명예퇴직을 했단다. 말리셨냐고 했더니,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아 말리지 않았단다. 지금은 뭘 하시냐니, 복숭아 농사를 짓는데 두 해는 죽을 쒔다가 지금은 제자리를 잡았단다. 남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매우 만족해한다고 했다. 사장님은 원래부터 카페를 하셨냐고 물으니 마사지 샵을 하다가 업종을 바꿨단다. 으흠, 그래서 이렇게 사교성이 좋은 거구나.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팥빙수 그릇 바닥이 보였다. 자아, 얘기는 이제 그만~. 가게 문을 나섰다. 아, 팥빙수 값은 현금으로 결제했다.

만나 같았던 팥빙수. 여주인과의 대화까지 버무려져 더 맛났다.


또 하늘을 본다. 맑다! 푸르다! 미치겠닷! 한참을 가는데 배꽃들이 화사하다. 포도도 많이 생산하지만 배도 많이 생산하나 보다. 영동읍내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붐빈다. 오매, 반가운 거! 길가 좌판에 할머니들이 나물을 놓고 팔고 있다. 생각 같아선 다 사드리고 싶다. 

화사한 배꽃. 문득 드는 생각, 이조년이 한낮의 배꽃을 두고 지은 시조는 없을까?


시계를 보니, 3시 10분이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왔다.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마음을 빼앗겨 지체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후회스럽지 않다! 언제 이런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으랴! 그나저나 어디 가기도 그렇고,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표했던 영동역(특별한 이유가 있어 이곳을 목표 지점으로 삼은 건 아니다. 숙박 시설이 많을 것 같아 정한 것뿐)에 거의 다 왔는데, 특별한 이름의 모텔이 눈에 띈다. 모텔 32. 호기심을 자아낸다. 무슨 뜻일까? 앳다, 저기로 들어가 보자!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투숙이 가능하다. 방을 달라며, 얼마냐고 물으니, 4만 원이란다. 일요일 가격치곤 싼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모텔의 일요일 숙박 가격은 평일 가격과 같다. 금요일 토요일만 특별 요금을 받는다.) 방으로 가는데 이제 갓 세팅을 마친 듯 객실마다 문이 열려있다. 문을 닫고 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하늘과 물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런가, 그렇게 많이 걸은 것도 아닌데 피곤하다. 일단, 씻고 보자!


샤워를 하고 제반 저녁 의식을 치렀다. 저녁을 사 먹으러 나갈까 하다 포기하고 그냥 간식거리로 저녁을 때웠다. 이상하게 모텔 안에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다. 전에 아파트 살 때도 그랬는데, 아파트 형태의 폐쇄 공간은 사람 마음도 닫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 사는 곳은 문만 열만 바로 나가 땅을 밟을 수 있기에 여간해선 방에만 있기가 어렵다. 꼭 밖에 나가게 된다. 공간과 심리는 상관관계가 많은 것 같다. 부질없이 TV를 켰다. 예의 시답잖은 프로들이 서로 자기를 봐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야들아, 좀 볼 만한 걸 내걸고 봐 달라고 허야지! 한바탕 혼을 내고 아우성을 등진 채  TV를 꺼버렸다. 갑자기 쥐 죽은 듯한 적막이 흐른다. 이따금 들리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뿐. 다시 곰의 후손이 되어 겨울잠을 자기로 했다. 내일은 상주 모동까지 간다. 그나저나 ‘32’는 무슨 뜻일까?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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