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넣었을까?

경옥고 포장 문구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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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열정이 없었다면 그의 의술은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이이화, 『인물 한국사』)


『동의보감』저자 허준은 양반가의 서자였다. 출사(벼슬길에 나아감)에 한계가 있는 신분이었던 것. 그가 의술을 접하게 된 배경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런 신분적 한계가 큰 이유였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출사에 한계가 없는 양반가의 자제라면 굳이 의술을 평생의 업으로 택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동의보감』도 이런 점에 착안, 그의 신분적 고뇌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의 상황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20대부터 의명(의원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알려져 있지 않은 기간이 사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의인(의사)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기 때문. 이 거듭난 시간이 있었기에 후일 『동의보감』같은 명저를 쓸 수 있었다고 보인다. 위에 언급했던 『소설 동의보감』도 이런 점에 착안, 그가 진정한 의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첫머리 이이화의 언급은 허준의 거듭난 의인으로서의 모습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은 경옥고(무병장수를 위한 한약의 일종)에 대한 『동의보감』내용 일부이다.


전정보수조진양성반노환동/보백손제백병만신구족오장영일/발백부흑치락갱생행여분마/일진수복종일불기갈공효불가진술/일료분오제가구탄환오인/일료분십제가구노체십인/약이십칠세복기수가지삼백육십/약육십사세복기수가지오백년(塡精補髓調眞養性返老還童/補百損除百病萬神俱足五藏盈溢/髮白復黑齒落更生行如奔馬/日進數服終日不飢渴功效不可盡述/一料分五劑可救癱瘓五人/一料分十劑可救勞瘵十人/若二十七歲服起壽可至三百六十/若六十四歲服起壽可至五百年)


정기와 골수를 채우고 보해주며 타고난 심성을 조화롭게 배양시켜 늙은이를 다시 어려지게 만든다. / 온갖 부족함과 병을 채우고 없애주어 정신과 오장을 튼튼하고 충실하게 만든다. / 흰머리를 다시 검어지게 만들고 빠진 이가 다시 돋게 하며 걸을때 달리는 말과 같게 만든다. / 하루에 수차례 복용하면 종일토록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나니 (경옥고의 약효는) 이루다 말할 수 없다. /한 경옥고 재료를 다섯 재로 나누어 사용한다면 중풍 환자 다섯 사람을 치료할 수 있고 / 한 경옥고 재료를 열 재로 나누어 사용한다면 결핵 환자 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 만약 27세에 복용을 시작한다면 수명이 360에 이를 수 있고(이렇게도 번역한다: 만약 27년을 먹으면 360세를 살고) / 64세에 시작한다면 수명이 500에 이를 수 있다(이렇게도 번역한다: 64년을 먹으면 500세를 살 수 있다).


경옥고가 얼마나 좋은 약인가를 설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설명 중에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한 경옥고 재료를 다섯 재로 나누어 사용한다면 중풍 환자 다섯 사람을 치료할 수 있고 / 한 경옥고 재료를 열 재로 나누어 사용한다면 결핵환자 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가 그것. 이 부분은 경옥고 설명에서 빼도 괜찮을 대목이다. 이 대목 앞 뒤 부분은 경옥고를 복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개인적 효과를 기술한 것이고, 이 대목은 그와 다소 동떨어진 설명이다. 이 대목이 빠져야 수미쌍관한 설명이 된다. 허준은 군더더기 같은 이 대목을 왜 넣은 걸까?


허준 당시 경옥고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들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나누어 먹으시오. 그러면 가련한 처지에 있는 다섯 명의 중풍 환자와 열 명의 결핵 환자를 고칠 수 있소이다." 이런 무언의 질책을 담아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그의 거듭남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다. "사람을 사랑하는 열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잘것없는 신분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삽입한 대목이라 본다. 견강부회한 생각일까?


사진은 아내가 수술을 받은 후 선물로 받은 경옥고 포장 내용 일부분이다. 이 포장에는 이 내용 외에도 '귀한 분만 드시는'이란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아내에게 위 추측 내용을 말하며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낯선 한자의 뜻과 음을 자세히 살펴보자.


塡은 土(흙 토)와 眞(참 진)의 합자이다. 빈 곳을 메운다는 뜻이다. 土로 뜻을 나타냈다. 眞은 음(진→전)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참된 것이란 바로 빈 곳 없이 충실한 상태를 이름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메울 전. 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充塡(충전, 무엇이 빠진 곳이나 빈 공간을 채움), 塡輔(전보, 메워 기움) 등을 들 수 있겠다.


髓는 骨(뼈 골)과 隋(墮의 약자, 떨어질 타)의 합자이다. 골수(뼈 속에 차있는 누른 빛의 기름 같은 물질)란 뜻이다. 骨로 뜻을 나타냈다. 隋는 음(타→수)을 담당한다. 隋는 후에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다. 골 수. 髓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腦髓(뇌수), 精髓(정수) 등을 들 수 있겠다.


溢은 氵(水의 변형, 물 수)와 益(더할 익)의 합자이다. 그릇의 물이 흘러넘친다란 뜻이다. 氵로 뜻을 나타냈다. 益은 음(익→일)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그릇에 물을 더하여 넘치게 됐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넘칠 일. 溢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海溢(해일), 充溢(충일) 등을 들 수 있겠다.


奔은 大와 卉(풀 훼)의 합자이다. 풀 밭 위를 내달린다란 뜻이다. 大는 달려가는 사람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달릴 분. 奔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奔走(분주), 出奔(출분) 등을 들 수 있겠다.


服은 배를 운행시킨다는 뜻이다. 月(舟의 변형, 배 주)로 뜻을 나타냈다. 나머지는 움을 담당한다. 행할 복. 입는다, 먹는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모두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입을(먹을) 복. 服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服從(복종), 服用(복용), 衣服(의복) 등을 들 수 있겠다.


劑는刂(刀의 변형, 칼 도)와 齊(가지런할 제)의 합자이다. 가지런히 절단한다란 뜻이다. 자를 자. 약재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약재 제. 劑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催眠劑(최면제), 湯劑(탕제, 달인 후 짜서 먹는 한약) 등을 들 수 있겠다.


癱은 疒(병 력)과 難(어려울 난)의 합자이다. 중풍이란 뜻이다. 疒으로 뜻을 나타냈다. 難은 음(난→탄)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병이 중풍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중풍 탄. 癱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癱瘓(탄탄, 중풍) 정도를 들 수 있겠다.


瘓은 疒(병 력)과 奐(클 환)의 합자이다. 중풍이란 뜻이다. 疒으로 뜻을 나타냈다. 奐은 음(환→탄)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몸을 마음대로 굽힐 수 없기에 늘 뻣뻣하게 늘어진 상태로 지내야 하는 병이 중풍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중풍 탄. 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癱瘓(탄탄, 중풍) 정도를 들 수 있겠다.


瘵는 疒(병 력)과 祭(제사 제)의 합자이다. 앓는다란 뜻이다. 疒으로 뜻을 표현했다. 祭는 음(제→채)을 담당한다. 앓을 채. 瘵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凋瘵(조채, 쇠하여 앓음)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선조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볼품없는 캐릭터가 된다. 그런데 허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더없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다. 중인 신분의 허준에게 벼슬아치 최고의 품계인 정 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허준이 여러 의학 서적을 쓸 수 있도록 지시하거나 배려했고 왕실 소장의 값진 도서를 다량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동의보감』도 이런 선조의 지시와 배려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 이전에 허준 자신이 그런 의학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겠지만). 어느 한 인물을 평가할 때는 늘 명과 암을 함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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