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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May 11. 2023

길에서 길을 묻다

20일 도보 국토 종단기(제17화)

4월 15일 토요일


몽롱한 상태에서 잠을 깼다. 똥둣간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냄새를 못 맡는데 간밤의 탈취제 냄새는 사라질 줄 모르고 코끝에 달라붙어 계속 자극했다. 밤새 몇 번을 깼다. 도대체 탈취제를 얼마나 뿌렸기에. 아무래도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을 만들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어머니 본향의 시조님께서 어여삐 여겨 살려주신 것 같다. 오늘은 고도의 초월 축지법을 사용하야 3일 갈 거리를 단 하룻만에 가기로 했다. 안나 할머니께선 평창에서 마평 청심대, 마평 청심대에서 상원사, 상원사에서 양양 서림까지 3일에 걸쳐 이동하셨는데, 나는 곧바로 평창에서 양양으로 비상하기로 한 것. 할머니는 지인도 있고 템플 스테이도 예약을 해놓아  그런 일정이 가능했으나, 나는 그럴만한 형편이 못돼 숙소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초월 축지법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버스에서 구경하는 차창 밖 풍경은 내가 즐기는 오락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도보여행의 정도를 어기는 게 다소 아쉽지만, 어차피 이미 버린 몸, 뭔 대수랴! (아니, 이 자가 이젠...) 더구나 오후엔 비 소식도 있다. 그래도 상원사는 한 번 들려봐야겠다. 한암 스님이 6.25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절이라니, 도대체 어떤 절이기에 그랬나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아침을 먹은 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모텔에 대한 복수로 이부자리를 그대로 펼쳐놓고 쓰레기도 약간 던져놓을까 하다 그만뒀다. 소심한 자의 양심이 발목을 잡아 그간 해오던 대로 모두 정리를 하고 나왔다. 아줌씨, 제발 탈취제는 쓰지 말아 주세요~. 너무 괴롭습니다! 오늘 숙소는 양양의 ‘몽(夢) 모텔’로 정했다. 후기에 호평이 많았기 때문. 가격도 적당했다. 5만 원. 토요일이니 이해할만한 가격이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평창에서 상원사를 가려면 우선 장평에 가야 하고 장평에서 다시 진부로 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상원사로 간다. 장평행 버스는 7시 15분 출발. 1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평창읍내를 한 바퀴 돌아봤다. 간 밤의 불쾌한 경험 때문일까, 이른 아침의 다소 스산한 느낌 때문일까, 평창읍은 마치 황량한 서부의 간이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의 본향이라 보너스 점수를 주려해도 줄만한 점수가 없었다. (평창 관련 분들 노여워 마셔요. 그냥 일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띈다. “촌집 팔아요. 4,900만 원. 주택지: 300평→2,500만 원.” 집은 그렇다 쳐도, 300평에 2,500만 원이면 평당 얼만겨? 8원 조금 넘네? 시상에, 이건 땅값이 아니라 똥값이네. 아니네, 똥값만도 못하네. 정화조 한 번 푸는데도 5만 원이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강원도 땅은 “금 따는 콩 밭’인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여. 그때 파 엎은 콩 밭이 아직도 회복이 안된 모양이지? 이 사람아, 지금 농담할 때여! 알어. 왜 모르겄어! 슬프니께, 그냥 한 번 웃으려고 농짓거리 한 거지. 작은 현수막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회지 집값 땅값에 비하면 모두 똥값이다. 세상만사 새옹지마인데 똥값이 금값 될 날도 오지 않을까?


** 여기까지는 당시 느꼈던 실제 느낌이다. 그런데 평당 8원은 나의 착오였다. 8만 원이 맞다. 산수에 서투른 나의 오류.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나의 생각도 당연히 오류. 농촌 소멸 인구 소멸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8만 원은 도시 땅값에 비하면 '똥값'이 분명하지만 일반 시골 땅값에 비하면, 잘은 모르지만, 아주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가격인 것 같다. 내용을 고칠까 하다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쓰고 싶어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노출시켰다. 헤아려 읽으셨기를!


장계 찍고 진부 찍고 상원사 주차장에 내렸다. 상원사 들어오기 전 월정사 입구에서 때 아닌 간첩 심문을 받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데, 월정사 매표소 직원이 올라오더니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첩에게는 5천 원을 받고, 현지인에게는 그보다 적게 혹은 그냥 관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버스에 타고 있어 입장료는 안내는 줄 알고 얼씨구나 하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애고 그놈의 입장료, 입장료. (사찰 입장료는 5월 4일 자로 몇 군데를 제외하고 폐지됐다. 대신에 국가나 지자체에서 보존해 준다.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니 그게 그거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절 들어갈 때마다 느꼈던 입장료 스트레스가 사라져 잘한 입법이라 생각된다.)      

웃긴 얘기. 옛날 차표라면 저 차표엔 '자 평창 지 장평'이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실제 그랬다.
모든 내용이 기록된 차표.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든다.


조금 오르니 상원사 소개 입간판이 보인다.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 세조 10년(1464) 왕사(王師)인 사미 등이 상원사의 중창 경위와 내역에 대해 기록한 것이란다. 왕실의 어첩과 권선문의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선문은 한문과 한글로 적혀있는데 한글 권선문은 한글 창제 당시의 서체와 표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써놨다. 국보란다. 그런데 핵심이 빠져 있다. 상원사 중창은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벌인 사업이며, 이 때문에 왕실에서 적지 않은 물품을 하사해 이런 기록물이 남게 된 것인데, 이 사실이 빠져있는 것. 입간판의 중창 권선문 사진을 보니 쌀이 5백 석, 비단이 5백 필, 베가 5백 필, 철이 1만 5천 근 내려진 것으로 나온다. 굉장한 시주이고, 세조(왕실)가(이)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에게 무슨 만수무강을 빌어주며, 또 그것이 고마워 하사품을 내려주는 것은 무슨 행위란 말인가. 대자대비한 부처님이니 다 용서하고 받아주실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내겐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교(政敎) 밀착의 추태를 보여주는 산 증거로 보인다(하긴 그런 것도 문화재적 가치라면 가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과한 생각일까?     

국보 평창 상원사 중창 권선문. 내겐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교 밀착을 보여주는 추악한 문서로 보였다.


상원사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다. 대웅전도 없고 문수전이 대웅전 구실을 한다. 거기다 새로 불사를 해서 허여멀건하기 까지 하다. 뭐여, 기대한 것 하곤 딴 판이네? 경내(境內) 찻집에서 주인에게 물으니, 상원사는 원래 암자였단다. 그려? 선초에 왕실의 총애를 받던 절인데, 암자였다고? 이상한디? 혹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녀? 그러나 절의 규모가 뭐 그리 대수랴. 절에 머물렀던 사람이 더 대수지. 상원사가 유명한 건 6.25 당시 이곳을 불태우려던 국군의 작전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켰던 한암 선사와 그의 제자인 불전(佛典) 한글 번역의 금자탑을 쌓은 탄허 스님 때문이다. 만약 이 두 분 스님이 없었다면 상원사는 별 볼일 없는 절이었을 것이다. 강진에서 다산을 빼면 시체인 것과 매한가지로 말이다. 두 큰 스님의 족적 때문에 이 작은 사찰은 길이 세인/수도인의 메카가 될 것 같다. 상원사를 나오며 시원시원한 현판 글씨 사진을 찍었다. 탄허 스님의 글씨. 어떤 인물이었을지 능히 짐작케 한다.     

의외로 소박한 상원사. 역시 사람이 중요하지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경내 찻집에서 사치를 부렸다. 대추차 한잔을 마신 것. 7천 원인데, 진했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서비스로 고구마 2개를 덤으로 줬다. 이른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찻집 주인이 ‘적멸보궁’을 한 번 가보라고 권한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자들의 필수 코스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니, 남자 걸음으로 한 40분 걸린단다. 불자는 아니지만 시간이 될 듯하여 가보기로 했다. 아까 상원사 주차장에서 올라올 때 간이 승강장의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는데 상원사에서 진부로 가는 버스가 11시 45분에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15분. 갔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오려면 시간이 약간 빠듯하지만 올라가는 시간은 40분이래도 내려오는 시간은 그보다 단축될 터이니, 갔다 올만 하겠다. 찻집을 나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대붕의 날개에 올라탄 듯한 장쾌한 글씨. 탄허 스님의 인격을 짐작케 한다.


주말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꽤 붐빈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계단으로 돼있어 생각보다 오르기가 힘들었다. 이런 길인데도 연세 드신 분들이 오르는 것을 종종 봤다. 사람의 신심(信心)이란 참으로 힘이 센 특이한 물건이다. 가는 중간중간 희한한 돌들이 설치돼 있었다. 끊기지 않고 깎아놓은 사과 껍데기 모양의 소형 돌들. 그런데 한참 가다 보니 여기서 소리가 났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오잉, 가만히 가서 살펴보니 속에 앰프 시설이 돼있다. 적멸보궁의 법회를 중계방송하고 있는 듯했다. 거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뭐 저렇게까지 하는 비웃음도 나오는 물건이었다. 재미 삼아 사진 한 장, 찰칵. 적멸보궁을 한줄기 바람처럼 쓱 휘돌아 본 뒤 바로 하산했다. 부처님, 다음에 시간 여유 있을 때 와서 천천히 둘러볼게요~.      

적멸보궁. 정말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을까? 어쩌면 신화일지도.


상원사에서 다시 진부로 돌아와 강릉 가는 표를 끊었다. 12시 30분 차다. 그런데 차가 안 왔다. 뭐여? 시골이니께, 이해 혀! 바로 이어지는 차가 12시 50분 차라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차에 학생들이 많이 탄다. 강릉으로 놀러 가는 것 같다. 그려, 한참 나이에 별 볼일 없는 면(面)에 뭐 볼 것이 있겄어. 시(市)나 가야 볼 것이 있겄지. 문득 중학교 때의 황당한 추억이 떠오른다. ㅇㅇ이와 공주에 영화 보러 놀러 갔었는데, 그게 어떻게 선생님들의 눈에 띄어 다음 날 구타를 당한 것이다. 지금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는데, 당시는 그게 통했다. 나는 그냥 선생님께 싹싹 빌었다. 가슴 아픈 건 이 사건 이후 ㅇㅇ이는 학교를 데면데면 나오다 결국 그만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잘 살고 있는지? 영화를 보러 가자고 꼬드긴 건 바로 나였기 때문에 ㅇㅇ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서울에서 파고다와 피카딜리 극장을 다녀본 적이 있는 내게 면 단위의 문화 환경은 말 그대로 답답 그 자체였다(초등학교 4학년 때 시골로 내려왔다). 더구나 머리가 살살 굵어지는 나이인 중학교 때는 그 답답함이 더했다. 하여 모처럼만에 ㅇㅇ이를 꼬드겨 영화 구경을 갔던 것인데, 그 사단이 생긴 것이다. 학교 현장에 있을 때 어쩌다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학생들은 “정말요?”를 연발했다. 그때는 그랬다.    

나의 축지법 부적. 요즘엔 돈만 있으면 누구나 축지법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강릉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뉴스를 보니 산불이 심하던데, 터미널이라 그런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겠다. 이른 점심 때문에 배가 고파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 5,900원어치 도넛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미제의 구정물(아메리카노의 별칭)도 마실까 하다 그만뒀다. 그간도 주제넘게 많이 마셨는데…. 2시 출발 양양행 버스표를 끊고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차창으로 구경하는 풍경도 재미있지만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맞은편에 ‘로또 판매점’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지만 끊어질 만하면 오고 끊어질 만하면 온다. 자기네 판매점에서 ㅇ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홍보물을 써붙였는데, 그게 한몫하는 것 같다. 사실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학교 다닐 때 대립각을 세웠던 교감이 자신은 자식들에게 절대 복권을 사지 말라 강조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양반, 평소 목소리가 내 큰 목소리의 두 배는 되었다.) 속으로 ‘그러셔? 그건 나하곤 의견이 맞으시네.’ 했다. 나는 복권(로또)이(가) ‘소확행’이란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생각한다. 나도 절대로 아이들에게 복권(로또) 사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빵 사 먹으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구경하다, 문득 이병욱 선생님을 떠올렸다. 춘천에 계신데, 갈 수도 있는데…. 퇴임했으니 춘천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들리라고 하셨는데. 막국수와 닭갈비를 사주시겠다며. 사실 양양행 버스표를 끊기 전 춘천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예의 수줍은 성격 탓에 막상 선생님을 봬도 당장이야 반갑지만 이후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아(술이나 마시면 취해서 횡설수설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뒀다. 온라인상으로 뵙는 것 하고 실제 뵙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병욱 선생님은 알라딘 블로그에서 알게 된 소설가이다. 교사 출신이신데 작고한 소설가 이외수와 자별하게 지내셨다. 최근에 그와 얽힌 청춘 시기를 그린 『세 남자의 겨울』이란 작품을 펴내셨다. 문단 세계에 과문해 선생님의 위상을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 생각으론, 매우 저평가된 숨은 보석 같은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페북에 이따금 올리는 짧은 글들을 보면 이 분의 내공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여, 『세 남자의 겨울』을 한 번 사 읽어 보시라! 내 말이 과히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외수 작고 즈음 전후하여 출판되고 빵빵한 광고 날렸으면 적지 않은 부수가 팔렸으리라 생각한다. 선생님께 전화라도 한 번 할까 하다 이 역시 그만뒀다. 어쩌면 그리운 채로 그냥 멀리 지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아사코를 마지막 만났을 때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차라리 아니 만났으면 좋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냥 온라인상으로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양양행 버스가 왔다. 양양으로 양양하게 출발~.     

강원여객 차표엔 마스코트가 들어 있다. 삭막하지 않아 좋다. 


비가 와서 그런가 약간 노곤하다. 양양에 도착할 때까지 간간이 졸았다. 터미널이 외진 곳에 있었다. 의외. 비 뿌리는 속을 돌진하여 중간에 마트에 잠깐 들렀다 숙소인 ‘몽 모텔’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숙소에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우중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거 애초 약속과 다르다. 숙박비가 6만 원이라고 돼있다. 사람도 없고 키오스크로만 결재하게 돼있다. 순간 기분이 ‘멍~’해졌다. 1만 원이면 식사 한 끼 값인데… 야속했지만, 우중이라 다른 데를 찾기가 너무 귀찮다. 그냥, 결정! 짐을 풀고 아까운 만원을 생각해 간이식으로 저녁을 때울까 하다 우중에 30여분 이상을(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걸어와 뜨거운 국물 있는 것을 먹고 싶어 과감히(!) 저녁을 사 먹으러 모텔 밖으로 나갔다. 칼국수 집이 바로 눈앞에 띄었다. 우중에, 칼국수, 좋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완전한 저녁 시간대라 아니라 그런가 썰렁하다. 손님 두 분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닭칼국수 메뉴가 눈에 띄어 주문했다. 내온 닭칼국수는 그렇고 그랬다. 그래도, 뜨듯한 국물 있는 것을 먹을 수 있으니, 이게 어디냐! 정신없이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저녁 제 의식을 치르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제천에서처럼 TV가 거대하다. 요즘 큰 화면의 TV 설치가 모텔의 유행인가?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역시나 볼만한 게 없다. 그런데 이 모텔, 그간의 모텔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TV밑에 성인방송 채널 시청 비번을 붙여 놓은 것.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그런데 성인 방송 채널을 눌러보니 “지금은 준비 중” 운운하며 10시 이후에 시청이 가능하다고 나온다. 10시까지 기둘러? 아이고, 앓느니 죽지. 그냥 여기저기 서로 저 잘났다며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애들을 ‘그려 그려’ 하며 고루고루 쓰다듬어주다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밤 꿈엔 오랜만에 내 님이나 한번 만나보자. 불을 끄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내일은 고성 봉포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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