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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May 12. 2023

길에서 길을 묻다

20일 도보 국토 종단기(제18화)

4월 16일 일요일


“여보, 식사!” “옙!” 맛있는 콩나물 김칫국이 식탁에 올라와 있다. 후루룩 쩝쩝! 처가 제발 입 다물고 먹으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끅~ 트림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불러 뿌듯하다. 갑자기 작은 것이 마렵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찰나, 잠에서 깨었다. 오매, 다 늙어서 실수할 뻔했네. 그것도 남의 이부자리에다. 불현듯 처가 끓여주는 콩나물 김칫국이 먹고 싶어 진다. 입맛만 다시고, 어제 마트에서 산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로 아침을 때웠다. 여행이 끝나갈 때가 돼서 그런가 점점 더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에 싫증이 난다. 아이고, 미안타, 야들아. 그래도 니들이 큰 힘이 돼줬는데, 종국엔 찬밥 취급하다니(실제로 찬밥이긴 하지만). 만원 더 낸 게 아까워 뽕을 뽑으려고 샤워를 한 뒤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앱을 켜고 고성 봉포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니 23km에 5시간 54분 걸린다고 나온다. 여유 있다. 오늘은 ‘리버사이드 모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평도 괜찮고 가격도 괜찮아 결정했다.     


도로에 인적이 별반 없다. 차들도 한산하다. 어제 양양 읍내에 들어설 때, 우중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는데 오늘 너무도 상반된 도로 풍경을 대하니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든다. 어제 풍경은 혹 꿈속의 풍경이었나? 기념으로 도로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른 아침의 양양 거리.  지난밤 붐볐던 인파 때문일까, 더 조용한 느낌이다.


어제 내렸던 버스 터미널을 지난다. 길가에 영산홍과 철쭉이 한껏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다. 꽃을 좋아하는 처를 위해 사진 한 장, 찰칵. 이런, 처는 영산홍과 철쭉을 별반 좋아하지 않는데…. 처는 들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 잔디밭에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꽃들도 함부로 뽑지 않는다. 잔디밭엔 잔디만 있어야지 여타 잡 것들이 있으면 잔디 관리도 안되고 나중에 잔디 깎기도 불편해, 처한테 타박을 하지만 고치질 않는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아예 영역을 분담하기로 했다. 앞 잔디밭은 처가, 뒤와 사이드 잔디밭은 내가 담당하기로 한 것. 과연 처는 잔디밭을 잘 관리할 수 있을는지? 자칭 생명주의자요 자연주의자인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귀가한 이후 처는 내게 SOS를 보냈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잔디밭에 즐비한 야리야리한 여러 풀꽃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자치하면 풀을 뽑으려다 고것들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는 것. 처한테 나도 모르게 세뇌당한 것 같다.)     

화사한 영산홍 철쭉. 여보, 들꽃만 좋아하는 것도 치우친 감정 아닐까요? 얘들이 서운해할 것 같아요.


낙산 해수욕장 안내판이 보인다. 들어갈까, 말까? 시간도 넉넉해 들어가기로 했다. 바닷가에 살고 있지만(실제 바닷가는 아니다. 바닷가에 가려면 적어도 20분 이상은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바다에 가면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소재를 ‘바다와 소년’으로 잡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나오려는데, 저쪽에서 뭔가 공사가 한창이다. 벌써 해수욕장 개장 준비를 하나보다. 인부들 얼굴을 보니 거의 내 대중이거나 더 많아 보인다. 시계를 보니 8시 38분인데, 이른 시간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같다. 아침은 든든하게들 자셨는지…. 문득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이 생각난다. 처도 자식도 있건만 조그만 원룸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 마음만 좋고 경제에 너무 어두워 여러 번 사기를 당하고 종국엔 식구들한테도 외면을 받아,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드리는 생활비로 근근이 생활하고 계신다. 마음만 안타까울 뿐 도와드리는데 한계가 있어 누님들과 매번 아쉬움을 토로하며 형수와 조카들을 성토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시대가 많이 변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시절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어떻게 자기 남편을, 아버지를…. 오늘 아침엔 무엇을 드셨을까? 지난번 뵙을 때 여쭤보니 아침은 라면으로 때우신다고 들었는데, 오늘도 라면으로 아침을 드셨을까? 그러나 나의 형님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저 공허한 안타까움일 뿐이다. 뭘 화끈하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 형님, 그래도 건강 관리 잘하셔요. 그래야 형제들 얼굴 오래 볼 수 있죠. 그리고 혹 그 네 가지가 없는 조카 X들이 회심해서 형님께 잘할는지도 모르니. 형수는 이미 황새 울었으니, 기대하시지 말고요.      

이른 아침부터 일하는 해수욕장 근로자 분들. 빛 뒤의 그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낙산사 들어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왠지 들어가고 싶다(‘왠지’가 적중했다. 절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건 낙산사가 처음이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예의 그 입장료 스트레스를 받으며 낙산사에 들어갔다. 휴일이어서 그런가 관광객들이 붐빈다. 화재로 전소된 후 새로 지어서인지 건물들이 멀끔하고 조경도 단정하다. 대지도 넓은 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통보전을 보고 나오며 작품 사진을 하나 찍었다. 원통보전을 찍은 게 아니라 원통보전 추녀를 배경으로 하늘을 찍은 것. 우리나라 건축물은 선이 아름답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아 확인 차 한 번 찍어본 것인데, 찍고 나서 확인해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주워들은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다.     

원통보전 추녀에서 한 컷. 날이 맑았으면 좀 더 멋진 작품이 됐을 텐데.


해수관음상을 보러 갔다. 한 아주머니가 절을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가 일어나 자리를 비꼈을 때 냉큼 사진을 찍었다.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름대로 미감이 느껴진다. 베트남 다낭에 갔다가 본 거대한 해수관음상과 대비된다. 그 관음상은 정말 거대만 했지 어떤 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 관음상을 보며 베트남도 경제가 좋아지면서 최고 최대를 숭상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나저나 바닷바람이 센데 너무 옷을 얇게 입고 계신 것 같다. 사시사철 저렇게 입고 계실 텐데, 건강이 염려된다. 보살님, 감기 조심하셔요~.      

해수관음상. 뭔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낙산사의 하이라이트는 '의상대'가 아닐까? 동해 일출 사진과 함께 꼭 등장하는 의상대. 바닷가 한 끝 언덕 위에 조신한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의상대를 대하니, 괜스레 못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한복 곱게 차려입은 약간 도도한 새색시를 보는 느낌이다. 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다. 곁에서 사진을 찍던 수다스러운 아주머니 한 분 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양한 포즈를 취해 보라며 성의 있게 찍어 주신다. 감사합니다~.      

한복 곱게 차려입은 약간 도도한 새색시 같은 의상대. 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데, 중간중간에 경내(境內)에 있는 찻집(기념품 집)을 찾지 말아 달라는 신도(信徒) 호소문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그간 임대로 영업을 해왔는데, 계약 기간이 끝났음에도 철수하지 않고 있으며, 건물도 제대로 보수를 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호소문만 보면 영업점이 악덕 업주인 것 같은데, 저쪽 입장을 들어보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럴까, 애타는 호소문에도 불구하고, 찻집(기념품 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바닷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저절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찻집이다. 나도 저절로, 애타는 호소문을 무시하고, 찻집(기념품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기념품을 돌아보는데 고개를 까딱이며 절을 하는 귀여운 동자승 인형이 보인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기념품을 파는 이 한테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얼마냐고요?”라고 되묻는다. 왠, 동문서답?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는데, 얼마냐라니? 사람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나 보다. 다시 되묻고, 허락을 받아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가격이 1만 5천이라 살만 해 하나 사고 싶었지만, 빤스 한 장도 버거운 여행 배낭에 동자승 인형을 넣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뒀다. (집에 돌아와 많이 후회했다. 여러 쇼핑몰을 뒤지며 낙산사에서 본 그 동자승 인형을 사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동영상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대추차를 한 잔 주문해 마셨다. 7천 원이다. 거의 점심 값. 한과 1개를 덤으로 준다.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답답한 실내를 나와 밖에서 마시는데,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다. 날씨가 약간 추운 데다 바람이 불어 그런 것 같다. 기모 바지에다 살짝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내겐 아무렇지도 않다. 본의 아니게 실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차를 마셨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신 대추차. 차는 어떤 장소에서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 같다.


찻집(기념품 집)을 나와 낙산사 나가는 길로 들어서려는데, 멋진 문구를 새긴 표석을 만났다.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길』이란 시집을 주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길에서 길을 만나다.'란 표석을 대하니 이 또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번 여행은 필시 하늘이 내게 점지해 주신 여행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길을 떠난 자에게 딱 어울리는 사물들을 만날 수 있으랴~. 오오~ 하늘이시여~! 속으로 무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듯한 문구. 이번 여행은 하늘이 점지해 주신 게 틀림없다!


낙산사를 나왔는데 화재 당시 참상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한 번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갔는데, 생각 외로 끔찍한 모습은 별반 없었다. 하기사 화재에 전소됐는데 뭐가…. 당시 탔던 목재로 지은 정자(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의상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와 석물 파편들을 늘어놓았다. 남대문도 그랬고 이곳도 그렇고 우리 문화재들은 대부분 목재라 정말 화재에 취약하다. 우리 문화재가 갖고 있는 숙명.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터.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큰 도로를 따라가다 자전거 도로 안내판이 있어 과감히 걷던 길을 바꿨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도 고성 봉포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을 듯했던 것(실제도 그랬다). 자전거 도로와 동파랑길 안내가 잘 돼있어 마음 편히 해안 길을 따라 걷는다. 번잡한 차 소리 듣지 않고 시원한 파도 소리 들으며 길을 걸으니, 그간 여행하면서 마음 졸였던 모든 압박감이 일거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지나온 과정이 힘들었기에 더 행복하게 걸은 듯.


몽돌 해변을 지난다.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라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가면, 모래사장과 달리, 와그르르 소리가 난다. 그릇에 담긴 바둑돌을 바닥에 쏟을 때 나는 듯한 소리. 와그르르….     

와그르르 와그르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큰 도로로 나와 걷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수복을 입고 즐기는데 유독 저곳에서만 사람들이 붐빈다. ‘물치 해변’인데, 너울성 파도가 다른 해변보다 커서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아직은 추운데… 지나면서 서핑을 마친 사람들이 벌벌 떨며 따뜻한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고, 그런 험한 것은 아랫사람들한테 시킬 것이지, 뭐 하러 손수 하느라고… 한바탕 훈수를 두었다(속으로).     

물개 떼, 가 아니고 서핑을 즐기는 이들이다. 추운데...


금강대교를 지난다. 높은 다리를 지나며 본의 아니게 아래에 사는 사람들 집 지붕을 보게 된다. 살림들이 곤고한지 많은 지붕이 슬레이트이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한쪽에선 추운 날씨에 서핑한다고 지랄 발광하는 모습이 보이고, 한쪽에선 곤고한 생활에 힘들 사람들 사는 곳이 보이니… 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내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곤고한 삶이 보이는 지붕. 괜히 남의 속살을 본 것 같아 얼른 시선을 돌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숙소를 향하야! 시계를 보니 4시다. 낙산사를 들린 데다 해변을 걸으며 종종 쉬었더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갑자기 주변에 모텔이 있으면 들어가 쉬고 싶어 진다. 그런데 하느님이 내 마음을 아셨나, 길가에 ‘해 담은 모텔’이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얼마 들어가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급회전을 한다. 굳이 방포까지 갈 필요는 없다. 얼마 안 남기는 했지만. 저기 가서 한 번 살펴보고 괜찮으면 머물기로 하자. ‘해담모’에 도착했는데 외관이 너무 훌륭하다. 아파트형인데,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조경수들에 지지대를 해놓았고 흙들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다. 바가지요금을 받을 게 분명해 보여 발길을 돌렸다. 다시 도로로 나와 발길을 옮기려다 그냥 전화나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네, 해담은입니다.” 싱그러운 여인의 목소리. “혹시, 방 있나요?” “네, 몇 분 이시죠?” “도보여행 중인데, 혼자입니다. 가격은 얼마?” “5만 원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싸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 결재를 하며 “왜 이렇게 가격이 싸죠?”했더니, 일요일엔 평일 가격을 받는다며, 또 혼자 묵는다고 해서 5천 원 깎아줬다고 한다. 오매, 좋은 거! 여주인 얼굴을 보니 얼굴이 해맑다. 그래서 ‘해 담은’이라고 모텔 이름을 지었나? 카드를 받아 들고 방에 들어갔다. 우와! 그간 지내왔던 모텔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모텔이다. 무인텔 급의 시설에다 베란다까지 있다. 전망도 좋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매, 좋은 거! 베란다 밖 바다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모텔에서 사진 찍기는 처음이다. 나중에 혹 이쪽으로 여행을 오게 되면 다시 한번 오고 싶은 모텔이다. 만약 외관만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연락을 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어려워 보인다고 금방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새삼스런 생각을 해본다. 샤워를 하고 여타 제 행사를 마친 뒤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있으니 마음도 그같이 변했나 야리꾸리한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해 담은 모텔'에서 한 컷. 이번 여행은 확실히 하늘이 점지해 주신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이런 멋진 숙소를 만나다니.


내일은 고성 통일 전망대 근처 금강산 콘도까지 간다. 앞으로 이틀이면 여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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