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한자(漢字)가 뭐라고

어떤 벽지 화제(畵題)

by 찔레꽃
pimg_7232191432208880.jpeg 한 음식점에서 찍은 벽지의 화제(畵題)


“그리고 그것은 편지꽂이 제일 위 구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이 꽂혀 있었네.”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한 대목이다. 편지를 훔친 D장관은 너무 평범하여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곳에 훔친 편지를 놓아둔다. 귀중한 것은 은밀한 곳에 감출 거라는 일반인의 인식을 뒤집은 것. 그의 예측대로 총감은 D장관 집의 은밀한 곳만 관심 깊게 수색하고 편지꽂이의 편지는 간과하고 만다. 그러나 뒤팡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도난당한 편지」는 추리소설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요즘의 한자 표기는「도난당한 편지」와 반대 모습을 보여준다. ‘도난당한 편지’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경우라면, ‘한자 표기’는 비범함 속에 평범함을 감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자 문맹을 길러낸 우리 교육의 웃고픈 현실이다(한자를 '비범함'이라 표현한 것은 많은 이들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사용한 표현일 뿐이다. 한자는 결코 비범하지 않다).


點心自體解決


일요일 아침 등산을 가기 전 아내에게 메모를 남겨 놓았다. 그날따라 까닭 모르게 한자로 쓰고 싶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물었다. “점심 차릴까?” “메모 써놨잖아! 먹고 왔어.” “뭐라고 썼는데?” “점심자체해결.” “그 뜻이었어? 아니, 그걸 꼭 그렇게 한자로 써야 돼?”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메모를) 뭐라고 읽은 거야?” “뭐, 마음 심자가 있기에 답답한 마음 해소하러 간다는 걸로 생각했지. 어제저녁에 답답하다고 했잖아!”


50줄에 들어선 아내조차 이러니 이하의 세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자 문맹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끔 주변에서 황당한(?) 경우를 접할 때가 있다. 위 사진도 그 한 실례. 한 음식점에 들렀다 찍은 것인데, 벽지에 인쇄된 것이다.


玉立蕭蕭竹數竿 옥립소소죽수간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서있는 대나무 몇 그루

風枝露葉帶淸寒 풍지노엽대청한 바람과 이슬 맞은 가지와 잎새 맑고 서늘함을 띄었네

美花山房 牛甫 미화산방 우보 미화산방에서 우보(소 같은 사내) 그리고 쓰다


이건 대나무에 관한 시이다. 그런데 이 화제 옆에는 대나무가 아닌 난초가 그려져 있다. 벽지의 시를 보는 이들은 대부분 난초에 관한 시일 거라 생각할 것이다. 벽지를 제작하는 이들은, 한자를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니, 아무거나 그려 넣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저 벽지를 제작했을 것이다(우보라는 이가 저 그림과 글씨를 함께 썼을 것 같지는 않다. 벽지를 제작하는 곳에서 임의로 짜집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눈 뜬 장님이 돼버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자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걸 배우고 가르치지 않아 장님이 되고 장님을 만드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양인들은 라틴어를 배우는 것에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자국어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우리 국어의 뿌리 역할을 한다. 우리 말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 아닌가. 그러면 당연히 한자를 배워야하는 것 아닐까? 한자를 배우는데 사대주의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열등감의 표현이다. 한자를 배우는 것은 단지 우리 말을 깊고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지, 결코 중국을 섬기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蕭는 艹(풀 초)와 肅(엄숙할 숙)의 합자이다. 쑥이란 뜻이다. 艹로 뜻을 표현했다. 肅은 음(숙→소)을 담당한다. 쑥 소. 쓸쓸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드문드문 나있는 쑥은 그 모습이 쓸쓸하단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쓸쓸할 소. 蕭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艾蕭(애소, 쑥), 蕭瑟(소슬,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부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數는 攴(칠 복)과 婁(성길 루)의 합자이다. 빈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셈을 한다는 뜻이다. 攴은 여기서 때리다란 뜻보다 셈을 할 때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는 모습을 형용한 의미로 사용됐다. 셀 수. 자주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이때는‘삭’으로 읽는다. 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數學(수학), 頻數(빈삭, 자주) 등을 들 수 있겠다.


竿은 竹(대 죽)과 干(방패 간)의 합자이다. 장대란 뜻이다. 竹으로 뜻을 표현했다. 干은 음을 나타내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干에는 곧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 장대 간. 낚싯대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낚싯대 간. 위 시에서는 대나무를 세는 단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竿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竿頭(간두, 장대 끝), 釣竿(조간, 낚싯대) 등을 들 수 있겠다.


葉은 艹(풀 초)와 葉(잎 섭) 약자의 합자이다. 초목의 잎사귀란 뜻이다. 잎사귀 엽. 葉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落葉(낙엽), 葉書(엽서) 등을 들 수 있겠다.


帶는 옷자락을 겹치게 묶고[llll] 묶고[一] 양 끝을 가지런히 늘어뜨린[巾巾] 큰 띠를 그린 것이다. 띠 대. 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革帶(혁대), 帶狀疱疹(대상포진)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가끔 아내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암호[한자 표기]를 사용하는 때가 있다. 주로 말로 하기 민망한 경우이다. 어느 날 아내가 한의원에 가는데, 나도 단골로 가는 한의원이라 내 약도 지어오라고 부탁하며 최근의 몸 상태를 나타낸 문구를 적어주었다. 囊濕及小便頻數. 다행히 아내는 암호의 내용을 캐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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