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문장대와 화양구곡 나들이
브레이크 타임, 점심 후 저녁을 맞이하기 위한 식당의 준비 시간. 우리네 생활에도 잠시 멈춤이 필요하죠. 매일이 노는 일인 백수에게 웬 브레이크 타임이냐며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백수이기에 더욱 필요할지도 몰라요. 늘어지기 쉬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니까요. 짧은 여행이나 마음 맞는 친구와의 만남은 백수에게 소중한 쉼표가 되어준답니다.
어린이날과 부처님 오신 날이 낀 연휴, 동창들과 1박 2일로 속리산 문장대와 화양구곡을 다녀왔어요. 연휴라 북적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한산해서 여유로운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답니다.
문장대에 오르던 날(5.5)은 날씨가 흐리고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지만, 오히려 땀이 덜 나서 산행하기엔 딱 좋았어요. 정상에 이르니 춥기까지 하더라고요. 발 아래 펼쳐진 끝없는 푸른 융단 같은 풍경은 저절로 감탄사를 자아냈답니다.
내려올 때는 왔던 길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한 친구가 속리산을 훤히 안다며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새로운 길로 안내했어요. 그 친구가 자신 있게 데려간 곳은 관음암이었는데, 정말 그럴 만했어요. 바위 틈새의 좁은 통로를 지나 암자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특별한 경험이었죠. 굽이진 돌계단을 올라서니, 학이 둥지를 튼 듯 아늑한 공간에 속리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었어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경업 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7년간 머물며 무예를 연마했다고 해요. 암자 뒤 바위 벽 중턱에는 장군이 새겼다는 ‘경업대(慶業臺)’라는 글자가 남아있더군요.
불교 신자인 동창 하나가 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스님께서 부처님 오신 날이니 떡을 먹고 가라며 권하셨어요. 문장대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온 터라 사양했더니, 그럼 수박이라도 한 조각 먹으라며 내어주시더라고요.
암자를 내려오며 문득 “산속에 살면서 도를 닦는 건 어떤 의미일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어요. 그러자 한 동창이 이렇게 답하더군요. “나는 도가 세속에 있다고 생각해. 세상사에 부딪히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삶, 그 자체가 도를 닦는 것 아닐까?” 다른 동창은 이 말에 덧붙여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홀가분하게 사는 삶도 괜찮지 않겠어?”라고 했죠. 이야기는 마치 베를 짜듯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어떤 종교든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출발점으로 돌아와 있더군요. 11시쯤 산행을 시작했는데, 내려오니 벌써 5시가 넘었어요. 꽤 많이 걸었죠. 이번 산행에도 지난번 가야산 등반 때 가져갔던 참나무 지팡이를 또 들고 갔어요. 녀석도 저를 따라 먼 길을 나선 셈이죠. 친구 하나가 마치 도승이 쓰는 지팡이 같다고 농담을 건네기에, 제 이름에서 받침을 빼면 ‘도’가 되니 도승의 지팡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겠냐고 어설프게 받아쳤어요.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술자리는 당연한 수순이었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었더군요.
다음 날, 나이 탓인지 늦게 잠들었음에도 다들 일찍 일어나 법주사로 향했어요. 부처님 오신 날 다음 날 아침이라 그런지, 법주사는 텅 빈 듯 고요한 분위기였어요. 명물인 팔상전과 거대한 미륵불 등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건물에 걸린 주련들도 읽어보았죠. 저희 모두 한문을 배우긴 했지만 제대로 읽거나 해석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래도 관심이 가서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다행히 법주사 주련에는 해서체 원문과 해석이 함께 붙어 있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어요. 다만, 해석이 너무 직역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서 조금 아쉬웠답니다.
다소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화양구곡으로 향했어요. 이곳 역시 사람이 없어 한적하게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했죠. 유명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눈에 띄었어요. 하지만 만동묘와 화양서원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해서 쓸쓸한 느낌을 주더군요. 한때 엄청난 세력을 자랑했다는 화양서원은 단출한 본채와 몇 채의 곁채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만동묘는 문이 잠겨 있었는데, 친구 하나가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죠(자물쇠가 채워져 있지는 않더라고요). 세 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아요.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무례하게 문을 열고….” 혼령이 꾸짖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망한 다른 나라[명]의 황제 신주(신종과 의종)를 모시는 정성은 한편으로는 지나친 사대주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선을 구해줬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좋게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명분은 그럴듯했을지 몰라도, 그 속내는 결국 대의명분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려 했던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건 후대의 평가이고, 당시에는 그게 사람들에게 통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 너무 후대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는 것도 역사를 정확하게 보는 것은 아닐지도 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길을 옮기니, 화양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들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림 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정말 훌륭한 풍경이었죠. 문장대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무척 깨끗했어요. (이번에 알았는데, 국립공원 내에서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친구 하나가 문장대 등반 시 배낭에 막걸리 두 병을 넣어 왔어요. 막걸리를 마시는 중에 그 친구가 막걸리 병을 탁자 아래 숨기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전에 음주 하다가 걸려서 벌금을 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화양구곡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9곡 파곶(巴串)이었어요. 다른 곳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은 직접 들어가서 물에 발을 담글 수 있었기 때문이죠. 출입 금지 띠 줄이 있었지만, 그걸 무시하는 용감한(?) 동창을 핑계 삼아 저도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저희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줄이 느슨하게 엉켜 있었거든요.) 파곶의 넓은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주변의 온갖 소리가 모두 물소리에 묻혀버리더군요. 저절로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가 실감 나게 와닿았어요.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바위 치며 미친 듯 내달아 산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들 말소리 지척서도 분간키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세상사 시비 소리 귀에 이를까 꺼려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롱산 짐짓 내닫는 물로 산 에워쌌다네
이런 것이 바로 추체험이라는 것이겠죠? 최치원의 경험이 저의 경험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한동안 넋을 놓고 물소리를 듣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곡을 떠났어요.
본래 동창들과 헤어진 후 하루 더 밖에서 묵으려고 했지만, 어제오늘 누린 아름다운 풍경에 누를 끼칠 것 같아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승흥이래 흥진이반(乘興而來 興盡而返,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온다)’이 꼭 왕자유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겠죠! 동창들과 늦은 점심을 먹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헤어졌어요.
풋풋했던 청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웃을 일도 별로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모처럼 만난 동창들과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니 잠시나마 젊어진 듯한 기분이었어요. 늙어가는 서글픈 나이에 마음 맞는 친구 몇몇이 곁에 있고,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복일 거예요.
이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났네요. 다시 일상이라는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에요.